1 |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던 비둘기 사건이 터졌을 때 조나단 |
2 |
노엘은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
3 |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
4 |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 그의 믿음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
5 |
그는 도대체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내적인 균형을 |
6 |
깨뜨리거나 외적인 일상의 질서를 마구 뒤섞어 놓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
7 |
했다. |
8 |
그런 사건들 대부분은 다행스럽게도 세월의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유년기나 청년기에 |
9 |
일어났으며, 그는 가능하면 그때의 일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였고, 어쩌다 |
10 |
피치 못하게 기억을 더듬어야만 할 때도 몹시 언짢아 하며 마지못해 하곤 |
11 |
하였다 샤렝통에서 살았을 때, 1942 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 날 |
12 |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다가 |
13 |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
14 |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
15 |
걸었다. 낚시를 갔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당연히 어머니가 부엌에서 |
16 |
음식을 만들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부엌으로 곧장 갔으나, 어머니는 온데간데없고, |
17 |
의자의 등걸이에 덩그머니 걸려 있는 앞치마만 눈에 뛸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
18 |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노라고 했다.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어머니를 아주 먼 |
19 |
곳으로 끌고 갔노라고 했다. 처음에는 벨로드롬 디베로 갔다가, 그곳보다 더 먼 |
20 |
드란시의 수용소로 갔다가, 거기에서부터 동쪽으로 다시 계속 갔는데 그쪽으로 간 |
21 |
사람은 아직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조나단은 그 사건을 도대체 하나도 |
22 |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그것은 그를 대단한 혼란 속에 빠뜨려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
23 |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후 조나단과 어린 누이동생은 |
24 |
얼떨결에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되었고, 밤이면 생면부지의 남자들이 |
25 |
시키는 대로 벌판을 가로지르고, 숲속을 헤쳐나가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
26 |
한참이나, 정말 무지하게 오랫동안 타고 가다가,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
27 |
친척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던 카바용에서 내려, 아저씨의 농가가 있던 퓌제 근처의 |
28 |
듀랑스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그는 |
29 |
누이와 함께 아저씨의 농토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다. |
30 |
50 년대 초조나단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 재미를 붙일 |
31 |
무렵,아저씨는 그를 군대에 입대시켰고, 그는 3 년 동안의 군 복무 의무를 |
32 |
고분고분히 따랐다. 첫해에는 성가신 집단 생활과 병영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에만 온 |
33 |
신경을 집중하였다. 둘째 해에는 배를 타고 인도지나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셋째 |
34 |
해에는 발과 다리의 총상과 아메바 성 이질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군 병원에서 |
35 |
보냈다. 그러다가 1954 년 봄 퓌제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누이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
36 |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는 거였다. 아저씨는 조나단에게 곧바로 결혼할 것을 권했고, |
37 |
그것도 이웃 마을 로리에 사는 마리 바꾸슈라는 처녀와 하라고 정해주었다. 그 여자를 |
38 |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조나단은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그것도 기꺼운 |
39 |
마음으로 따랐다. 결혼생활이 무엇인지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아무런 |
40 |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평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
41 |
그것이야말로 그가 늘 꿈꾸어왔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후 불과 4개월 만에 |
42 |
마리는 사내 아이를 낳았고, 같은 해 가을에 튀니지 사람으로 마르세이유에서 온 과일 |
43 |
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
44 |
그런 모든 불상사를 겪고 나자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
45 |
것과, 그들을 멀리 해야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
46 |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되면서, 비웃음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
47 |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성가셨기 때문에 난생 처음 독자적으로 |
48 |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농협으로 가서 그동안 저금해 두었던 돈을 몽땅 찾고, |
49 |
짐을 꾸려 파리로 떠났던 것이다. |
50 |
파리에서 그는 큰 행운을 두 개나 잡았다. 세브르가에 있는 어느 은행의 경비원으로 |
51 |
취직이 되었고, 플랑슈 가에 있는 집 7층에 코딱지만한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
52 |
방까지 올라가려면 뒷마당을 지나, 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서, |
53 |
가끔씩 햇살이 비취는 창문이 하나 나 있는 비좁은 복도를 지나가야만 했다. 복도에는 |
54 |
회색 페인트 칠을 한 문마다 번호가 붙여져 있는 작은 방들이 20여 개 있었는데, 그 |
55 |
중에 제일 끝에 있고 번호가 24번인 방이 조나단의 방이었다. 방은 길이가 3.4 |
56 |
미터이고, 폭은 2.2 미터이며, 높이가 2.5 미터였다. 방 안에 가구라고는 유일하게 |
57 |
안락한 침대가 하나, 책상이 하나, 의자가 하나, 전등이 하나 그리고 옷걸이가 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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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60 년대가 되어서야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는 |
59 |
전기 기구와 난방기를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전력이 강화되었고, 수돗물도 사용할 수 |
60 |
있게 되어 각 방마다 세면대와 보일러가 따로 설치되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
61 |
제일 위층에 살던 사람들은 사용이 금지되었던 알콜 버너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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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어야만 했고, 싸늘한 방에서 잠을 잤고, 양말을 빨 때와 몇 가지 안되는 |
63 |
식기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을 씻을 때도 복도에 단 하나 있고, 공동 변소 바로 |
64 |
옆에 있던 세면대를 사용해야만 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조나단에게는 아무런 |
65 |
문제도 되지 않았다. 굳이 편안한 곳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만 삶의 |
66 |
마땅찮은 불상사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쫓을 수 |
67 |
없는 그런 확실한 곳으로서, 온전하게 자기 혼자만의 소유로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
68 |
24 호실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곳이 바로 그런 곳이 되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
69 |
있었다. '바로 이거야. 이런 곳을 언제나 갈망했었지. 이곳에서 살자.' (대부분의 많은 |
70 |
남자들이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자기와 일생을 함께 할 여자요, 자기의 |
71 |
소유가 될 여자요, 인생이 다 하는 순간까지 곁에 머물러 있을 여자라는 생각을 |
72 |
번개처럼 뇌리에 떠올린다는, 이른바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감정이었다.) |
73 |
조나단 노엘은 그 방을 옛날 돈으로 월세 5천 프랑씩 내기로 하고 들어가, 그곳에서 |
74 |
날마다 아침이면 세브르가에 있는 일터로 갔다가, 저녁이면 빵과 소시지와 사과와 |
75 |
치즈를 사갖고 돌아와서는 그것을 먹고, 자고 또 행복해 했다. 일요일이 되면 방에서 |
76 |
좀처럼 나가지도 않았고, 방을 반들반들하게 닦거나, 침대보를 새 것으로 바꿔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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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그는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가면서, 십 년이 가고 또 십 |
78 |
년이 흐르도록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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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동안 외부적인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이를테면 방세가 변했고, 입주해 있는 |
80 |
사람들의 면면이 바뀌었다. 50 년대만 하더라도 다른 방에는 파출부로 일하는 |
81 |
여자들이 많이 살았고, 갓 결혼한 신혼 부부나 퇴직한 노인들이 살았다. 그 다음에는 |
82 |
스페인 사람이나 포르투갈 사람 혹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이사를 오고 가는 |
83 |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60 년대 말에는 대학생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살았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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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는 스물네개의 방이 다 임대되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방들이 그냥 빈 채로 |
85 |
있거나, 아래층에 살림집을 꾸미고 사는 다른 세대의 창고나 혹은 가끔씩 쓰는 손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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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이용되곤 하였다. 조나단 노엘의 방인 24 호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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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주거지로 변했다. 그 사이에 침대도 새 것으로 바꾸었고, 붙박이장을 하나 |
88 |
마련했으며, 7.5 평방 미터의 방 바닥에 잿빛 카페트를 깔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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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가 있는 구석에 라커 칠을 한 빨간색 벽지를 붙여놓기도 하였다. 라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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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젼, 다리미도 들여놓았다. 식료품은 과거처럼 자루에 넣어 창 밖으로 걸어두며 |
91 |
보관하지 않고, 세면대 밑에 있는 난쟁이 냉장고에 넣어두게 되어 뜨거운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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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라도 버터가 녹는다든가, 소세지가 말라 비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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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머리맡에는 선반을 하나 매달아서 17권도 넘는 책들을 꽂아놓았다. 포켓 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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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세 권을 비롯하여 크로마뇽 인과 청동기 시대의 주조 기술, 고대 이집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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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투루리아 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다룬 몇 권의 아름다운 화보집, 범선에 관한 책 |
96 |
한권, 여러 가지 깃발에 관한 책 한 권,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 한 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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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뒤마 1세의 소설책 두 권, 생시몽의 회고록, 전골 요리책 한 권, 라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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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한 권과 직무상의 권총 사용 규정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을 다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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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을 위한 요점 정리 책자 한 권 등이 있었다. 침대 밑에는 포도주도 십여 병이나 |
100 |
모아두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1998 년 퇴임식 날 마시려고 특별히 준비해 둔 '사토 |
101 |
슈발 블랑'이라는 고급 포도주도 한 병 끼어 있었다.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설치한 |
102 |
전등불은 조나단이 방 안의 세 곳침대 머리맡이나 침대 발치 혹은 |
103 |
책상,가운데 어느 곳에서든지 앉아 신문을 읽더라도 눈이 부시지 않고, 신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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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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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물건을 많이 들여놓다 보니 방은 마치 너무 많은 진주알을 품은 조개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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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빠듯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각도의 절묘한 공간 활용은 그 방을 그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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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코딱지만한 방이라기 보다는 배의 선실이나 고급 기차의 침대칸처럼 보이게 |
108 |
만들었다. 그러나 그 방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30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왔다. |
109 |
그곳은 조나단에게 있어서 불안한 세상의 안전한 섬 같은 곳이었고, 그의 확실한 |
110 |
의지처였으며, 도피처였다. 그것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애인, 정말 애인 같은 |
111 |
것이었다. 그 작은 방은 저녁에 그가 돌아오면 그의 체온을 따스하게 감싸주었으며, |
112 |
그가 필요로 할 때는 영혼과 실체로서 항상 그의 곁에 있어주었고, 결코 그를 버리지 |
113 |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오직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을 |
114 |
만한 것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
115 |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나이가 오십이 넘었고, 그 많은 층계를 |
116 |
오르는 일이 가끔씩 힘에 부치고, 번듯한 부엌과 자기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욕실을 |
117 |
갖춘 제대로 된 아파트를 임대할 수 있을 만큼 봉급을 받게 되기는 하였어도 |
118 |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그는 층실하려고 노력하였고, 오히려 그것에 |
119 |
밀착하여 그것과 좀 더 가깝게 자신을 묶어 매고자 계획하였다. 그 방을 아^예 |
120 |
자기 것으로 구입함으로써 그것과 자신과의 관계를 영원히 깰래야 깰 수 없는 관계로 |
121 |
만들 생각이었다. 집 소유주인 라살르 부인과의 계약도 이미 마쳤다. 방 값은 새로 |
122 |
나온 돈으로 5 만 5 천 프랑을 내기로 했다. 그중에 4 만 7 천 프랑은 벌써 지불을 |
123 |
끝낸 상태였다. 나머지 8천 프랑만 연말에 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
124 |
마침내 그의 소유가 될 것이고, 죽음이 그 둘을 갈라놓기 전에는 이 세상의 그 어느 |
125 |
것도 조나단과 그가 사랑하는 방을 떼어놓을 수 없게 될 터였다. |
126 |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 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
127 |
상황이었다. |
128 |
조나단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실내화를 찾아 신고, 나이트 |
129 |
가운을 입은 채 여느 아침처럼 면도를 하기 전에 복도에 있는 공동 변소를 찾아 나설 |
130 |
참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그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귀를 문에 |
131 |
바짝 갖다댔다. 같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그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
132 |
더구나 이른 아침에 잠옷과 나이트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그것도 하필이면 변소에 |
133 |
가는 길에 만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화장실이 사용중이라는 것을 |
134 |
알게 되는 것만도 그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세들어 있는 |
135 |
사람 가운데 누군가와 화장실 앞에서 맞닥뜨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
136 |
노릇이었다. 그런 경우를 25 년 전인 1959 년 여름에 딱 한 번 당했는데, 그때의 일을 |
137 |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여전히 등에 소름이 끼쳤다. 상대방을 보고 동시에 놀라 |
138 |
소스라쳤고, 상대가 몰랐었다면 딱 좋았을 일을 상대에게 들킴으로 해서 두 사람이 |
139 |
똑같이 익명성을 잃어버렸었다. 둘 다 똑같이 한 발 물러섰다가, 또 다시 앞으로 |
140 |
다가섰으며, 성급하게 부랴부랴 예의를 갖추려고 했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아니 |
141 |
괜찮아요, 아저씨." "하나도 안 급합니다." "아니에요." "먼저 하시지요." "제가 |
142 |
드리고 싶은 말씀인 걸요." 그런 모든 짓거리를 잠옷 바람으로 했었다! 그는 그런 |
143 |
꼴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고, 또 미리 조심스럽게 밖의 소리를 엿들어왔던 습관 |
144 |
덕택에 그 이후에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문 밖에서 |
145 |
나는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복도에서 나는 소리를 그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
146 |
탁탁거리는 소리라든가, 뭔가 스쳐지나가는 소리, 심지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
147 |
침묵의 의미마저 그는 다 꿰뚫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그는이미 불과 |
148 |
몇 초 전에 문에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기 때문에,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
149 |
것과 화장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모두 잠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
150 |
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오른쪽 손으로는 용수철 자물쇠의 손잡이를 |
151 |
돌린 다음, 빗장을 열고, 문을 가볍게 밀며 활짝 열었다. |
152 |
발 한쪽을 문지방 너머로 거의 떼어 놓을 뻔한 순간이었다. 이미 왼쪽 다리를 든 |
153 |
다음이었고그가 그것을 목격하였을 때 그의 발은 막 걸음을 옮겨놓으려던 |
154 |
참이었다,그것이 그의 문밖에 앉아 있었다.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
155 |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의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 있었다. |
156 |
납회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빨간색이며 |
157 |
갈퀴 발톱을 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
158 |
새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159 |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이었고, 갈색에 가운데가 까만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
160 |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
161 |
듯이,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
162 |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눈 속에 교활한 머뭇거림이 숨어 있는 것 |
163 |
같기도 하였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무표정하거나 머뭇거리는 듯 보이지 않았고, |
164 |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
165 |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조차도 |
166 |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
167 |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
168 |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그때의 순간을 나중에 그렇게 표현할 수도 |
169 |
있었겠지만,그 말은 사실상 옳지 않았다. 정작 그를 더욱 놀라게 했던 순간은 |
170 |
좀더 나중에 있었다. 그때야말로 그는 까무러치게 놀라 죽을 뻔했다. |
171 |
5초, 어쩌면 10초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그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 같은 |
172 |
시간이었다,손으로는 손잡이를 그대로 잡고, 발은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자세로 |
173 |
위로 든 채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
174 |
못하면서 문지방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약간의 미동이 있었다. 비둘기가 두 발의 |
175 |
위치를 바꾸었는지, 날갯죽지를 약간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어쨌든 새의 |
176 |
몸이 약간 꿈틀대는 듯 하더니,그와 동시에 눈꺼풀이 눈을 덮어버리는 |
177 |
것이었다. 눈꺼풀이 하나는 아래쪽에서, 또 하나는 위쪽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실제로 |
178 |
그것은 눈꺼풀이라기보다는 고무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씌우개처럼 보였고, 아무것도 |
179 |
없다가 갑자기 생겨나 순식간에 눈을 삼켜버린 입술같은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
180 |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조나단은 공포로 몸서리를 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
181 |
머리카락도 빳빳하게 섰다. 비둘기의 눈이 미처 다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
182 |
그는 후다닥 방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부들부들 |
183 |
떨며 비틀비틀 침대까지 가, 마구 방망이질 쳐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털푸덕 |
184 |
주저앉았다. 이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목덜미와 등허리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
185 |
그의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심장 마비나 뇌졸중 혹은 최소한 혈액 순환 장애 |
186 |
정도는 걸릴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나이 오십부터는 아주 사소한 계기만 생겨도 그런 |
187 |
험한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 이미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자각 |
188 |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모로 누운 다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어깻죽지 |
189 |
위까지 담요를 끌어올려 덮고그가 언젠가 포켓용 의학 사전에서 전형적인 심장 |
190 |
마비 증세라고 읽은 바 있는,경련을 일으킬 듯한 심한 통증과 가슴 부위 및 |
191 |
어깨 근처에 콕콕 찌르는 듯한 증세와 또는 의식이 서서히 꺼져가는 현상이 |
192 |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것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은 차츰 |
193 |
진정이 되었고, 피는 다시 머리와 사지 쪽으로 고르게 돌았으며, 뇌졸중의 확실한 |
194 |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고, |
195 |
얼굴도 찡그려볼 수 있었으므로 신체 기관과 신경이 그런 대로 정상이라는 증거가 |
196 |
되었다. |
197 |
대신 그의 뇌리에는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공포의 사념들이 무더기로 떠오르며 마치 |
198 |
한 무리의 까마귀 떼들처럼 머리 속을 시끄럽게 소리치며 휘저었고, 또 자기들끼리 |
199 |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였다. |
200 |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
201 |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
202 |
너를 방 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하게 만들고, 가두어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
203 |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
204 |
실패한 거야. 한낱 비둘기가 망쳐놓았으니 넌 망한 거야. 넌 새를 죽여야 돼. 그러나 |
205 |
넌 그걸 절대로 죽이지 못해. 파리 한 마리도 넌 잡지 못해. 아니, 파리 정도라면 할 |
206 |
수도 있겠지, 파리가 딱 한 마리라면, 혹은 모기 한 마리나 작은 딱정벌레라면 그럴 |
207 |
수도 있겠지만,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절대로, 더구나 비둘기처럼 몸무게가 한 |
208 |
파운드나 되면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죽이지 못해. 그것보다는 차라리 |
209 |
총으로 사람을 쏘는 편이 쉽겠지, 따^당! 그렇게 하는 것이 신속하고, 겨우 8 |
210 |
밀리미터 밖에 안 되는 구멍만 남기게 될 거야. 뒤가 깨끗하고 법적으로도 허용되는 |
211 |
일일 테니까. 긴급한 상황에서는 허용되는 법이잖아. 더구나 무장 경비원의 근무 규정 |
212 |
제 1조를 보면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명시되어 있지. 네가 사람을 향해 총을 쐈다면 |
213 |
어느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비둘기를 그랬다면? 비둘기를 어떻게 |
214 |
쏜단 말인가? 그것이 퍼덕거릴 테니까 총알이 쉽게 빗나갈 테고, 비둘기를 총으로 |
215 |
쏜다는 것은 야만적인 불법 행위요 금지된 짓이니까 결과적으로 직무상 부여받은 |
216 |
무기를 압수당하고 직장을 잃게 되겠지. 비둘기를 총으로 쐈다고 감옥으로 끌려갈지도 |
217 |
모르지. 아니, 넌 그것을 절대로 죽일 수 없어. 그렇다고 살 수도, 그것과 더불어서 |
218 |
함께 살 수도 없어. 결코 안 돼. 비둘기가 안에서 살고 있는 집에 인간이 같이 살 |
219 |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둘기는 혼란과 무질서의 대명사가 될 거야. 예측을 불허한 채 |
220 |
울면서 아무데로나 마구 돌아다니고, 발톱으로 할퀴는가 하면 눈을 콕콕 찌르기도 할 |
221 |
비둘기, 쉴 새 없이 집을 더럽히고, 무시무시한 박테리아 균을 털어놓거나, 뇌막염을 |
222 |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몰고 다닐 비둘기. 더구나 그것은 혼자 살지도 않겠지. 다른 |
223 |
비둘기를 꼬드겨서 데리고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짝짓기가 이루어질테고, 그렇게 되면 |
224 |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새끼가 번식되겠지.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너를 포위하게 될 |
225 |
거야. 넌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거야. 굶주려 죽게 될 거야. 네 자신의 |
226 |
배설물 냄새로 질식할 수도 있겠지. 마침내는 창 밖으로 몸을 던질 테고, 네 몸은 보도 |
227 |
위에 만신창이가 되어 쭉 뻗게 될 거야. 아니, 넌 너무 겁이 많아. 방문을 걸어 잠근 |
228 |
채 도와달라고 소리칠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사다리를 갖고와서 비둘기로부터 너를 |
229 |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넌 소방관을 찾을거야. 겨우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
230 |
말이야!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테고,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
231 |
경멸의 대상이 되겠지. "저기 노엘 씨 좀 봐!"라고 소리치면서 사람들은 네게 |
232 |
손가락질을 하게 될 거야. "저것 봐, 노엘 씨가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구조를 |
233 |
요청했대!" 사람들은 널 정신 병원에 보내려고 할 거야. 오! 불쌍한 조나단, 네가 처해 |
234 |
있는 현상황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넌 망했어.' |
235 |
그런 따위의 사특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꽥꽥 소리치며 외쳐댔고, 조나단은 |
236 |
너무나 당혹스럽고 절망적인 나머지 유년 시절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
237 |
절박한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
238 |
"오, 하느님, 하느님."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
239 |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제게 이다지도 큰 벌을 내리시나이까? 하늘에 계신 |
240 |
아버지시여, 제발 저를 저 비둘기로부터 구해주소서! 아멘!" |
241 |
보다시피 그것은 제대로 형식을 갖춘 기도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 속에 남아 |
242 |
있는 초보적인 종교 교육의 토막들을 어설프게 짜맞춰서 토해내 놓은 꼴이라고 |
243 |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그렇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정신 집중을 해야만 했기 |
244 |
때문에 온갖 잡념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기는 하였다. |
245 |
그리고 그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 좀더 강한 힘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기도를 |
246 |
마치기가 무섭게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꼈으며, 그것은 즉시 어디로든지 가서 볼 |
247 |
일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가 누워 있는 훌륭한 매트리스는 물론이거니와 멋진 잿빛 |
248 |
카페트가 더럽게 젖을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정신이 퍼뜩 |
249 |
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문 쪽으로 난감한 |
250 |
시선을 던졌다 아니, 그 문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갈 수 없었다. 설령 |
251 |
애꿎은 비둘기가 그 사이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화장실까지 갈 자신이 |
252 |
없었다,세면대로 가서 나이트 가운의 앞섶을 열고, 잠옷 바지를 밑으로 내린 |
253 |
다음, 수도꼭지를 틀고, 세면기 안에다 오줌을 눴다. |
254 |
전에는 그런 짓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백색의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세수는 |
255 |
물론이거니와 그릇마저 씻는 용도로 사용해 온 세면기에 오줌을 누고 있다는 |
256 |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기의 인격이 이 정도로 형편 없이 땅에 |
257 |
떨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으며, 어떤 경우든 이런 신성 모독적인 |
258 |
행위를 범할 만한 입장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일을 다 |
259 |
마치고도 한참 동안 계속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다음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
260 |
행위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액체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
261 |
"딱 한 번 그랬으니까 괜찮아." |
262 |
세면대와 방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
263 |
"한 번 한 것은 괜찮아. 꼭 한 번 다급한 사정으로 한 짓이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
264 |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
265 |
그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씻고, 액체 세제병을 치우고, 걸레를 짜는자주 |
266 |
해와서 몸에 아주 익숙해진,행동들이 그로 하여금 다시 정신을 가다듬을 수 |
267 |
있게 하였다. 시계를 보았다. 방금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때 7시 |
268 |
15분이면 면도를 끝내고, 침대도 정리를 끝내놓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
269 |
뒤처진 것은 부득이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를 거르면 빠듯하게 만회할 수 있을 것 |
270 |
같았다. 실제로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그의 계산대로라면,평소보다도 |
271 |
7분이나 빨랐다. 중요한 것은 그가 8시 5분에 방을 나서야 8시 15분까지 은행으로 갈 |
272 |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지만 어쨌든 |
273 |
그에게는 아직 45분이라는 유^예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긴 시간이었다. 방금 전에 |
274 |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심장마비를 겨우 모면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45분은 많은 |
275 |
시간이었다. 더구나 꽉 찬 방광 때문에 차츰 더해가던 압박감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
276 |
사람에게 있어서의 그것은 실제의 곱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우선 그는 마치 아무일도 |
277 |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로 맘을 먹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해야 될 |
278 |
일들을 그냥 하기로 했다. 세면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면도를 시작했다. |
279 |
면도를 하는 동안 그는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
280 |
"조나단 노엘, 넌 2 년 동안 인도지나에서 군복무를 했고, 또 그곳에서 온갖 힘겨운 |
281 |
상황들을 잘 견뎌냈었지. 너의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하고,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
282 |
행운이 따라준다면 넌 이 방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어." |
283 |
그런데 막상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에 대한 |
284 |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로 문 앞에 있는 그 흉물스러운 새 옆을 지나서, 아무런 |
285 |
불상사도 당하지 않고 층계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그렇게 안전 지대로 피신한다면 그 |
286 |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직장으로 출근하고, 낮 시간을 무사히 |
287 |
넘길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
288 |
(오늘 저녁이 되면 어디로 가야 되지? 밤은 또 어디서 보내고?기왕에 |
289 |
도망치는 마당에,비둘기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
290 |
그 새하고는 한 지붕 아래서 단 하루, 단 하룻밤, 단 한 시간이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은 |
291 |
내 확고부동한 생각이야. 그러니 오늘 밤, 아니 그 이후의 며칠도 호텔에서 묵을 |
292 |
준비를 해야겠군. 그렇다면 면도기와 칫솔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가야지. 그런 |
293 |
것들 말고도 개인 수표책도 챙이고, 혹시 모르니까 저금 통장도 가지고 가야겠어. |
294 |
수표로 끊는 통장 구좌에는 1천2백 프랑이 들어있다. 그 정도라면 2주일은 버틸 수 |
295 |
있어. 물론 방을 싼 것으로 얻는다는 전제를 한다면 그렇지.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
296 |
비둘기가 방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면, 그 때는 다시 저금해 두었던 돈도 꺼내 |
297 |
써야만 하겠군. 통장에는 6천 프랑이 들어 있지. 상당히 많은 돈이야. 그 돈으로라면 |
298 |
몇 달이건 호텔에서 지낼 수 있을 거야. 거기에다가 매달 실수령액으로 3천7백 프랑을 |
299 |
월급으로 받고 있잖아. 그래도 연말에 8천 프랑을 라살르 부인에게 마지막 잔금으로 |
300 |
지불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지. 방 값으로 말이야. 더 이상 살지도 않을 방 값을 |
301 |
내는 꼴이군. 마지막 잔금 내는 날짜를 조금 늦춰달라고 라살르 부인에게 둘러댈 |
302 |
구실이 필요할텐데. 아무리 그래도 구입하기로 약속한 방의 출입을 비둘기가 막고 |
303 |
있어서 몇 달째 호텔에서 묵고 있기 때문에 잔금으로 남은 8천 프랑을 낼 수 없다고 |
304 |
말할 수는 없지 정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
305 |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금화가 다섯 개 있다는 것이 갑자기 머리 속에 |
306 |
떠올랐다. 하나에 6백 프랑의 값어치는 충분히 될 다섯 개의 나폴레옹 금화들은 |
307 |
알제리가 전쟁중이던 1958 년에 인플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두었던 것들이었다. |
308 |
(그것들을 필히 가져가야지 그것말고도 어머니의 가는 황금 팔찌도 있어. |
309 |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있고. 그리고 전직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급되었던 |
310 |
고급스러운 은도금 볼펜도 있지. 그런 진귀한 물건들을 다 팔아버리고, 아주 근검 |
311 |
절약한 생활을 한다면 연말까지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8천 프랑을 라살르 |
312 |
부인에게 낼 수 있을 거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내년 1월부터는 방이 내 것이니까 |
313 |
방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어서 사정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비둘기가 |
314 |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잖아? 비둘기의 수명이 얼마나 되더라? 2 년, 3 년, 10 |
315 |
년? 게다가 그 새가 이미 늙은 것이었다면? 혹시 1주일 안에 되는 건 아닐까? 아니, |
316 |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몰라. 그냥 죽으려고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르지) |
317 |
면도를 마치고, 받아두었던 물을 내보내고, 다시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발도 |
318 |
닦았다. 이를 닦은 다음 다 쓴 물을 다시 내보내고, 걸레로 세면대 물기를 깨끗하게 |
319 |
닦았다. 그리고 침대도 정리했다. |
320 |
옷장 아래에는 더러운 옷들을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세탁소로 가져가기 |
321 |
위해 빨랫감을 보관하는 낡은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속을 비운 다음 |
322 |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그가 1942 년 샤렝통에서 카바용으로 갈 때 들었던 |
323 |
가방이고, 1954 년 파리로 올 때 썼던 것이기도 했다. 그 허름한 가방을 이제는 침대 |
324 |
위에 올려놓고, 더러운 빨랫감이 아니라마치 여행을 떠나는 |
325 |
사람처럼,깨끗한 옷가지, 구두, 세면용품, 다리미, 수표책, 귀중품 등으로 |
326 |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그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혔다. 이번에는 부끄러워서가 |
327 |
아니라 절망적인 허탈함 때문이었다. 마치 인생이 30 년 전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것 |
328 |
같았고, 지난 30 년이 송두리째 다 날아가버리는 느낌이었다. |
329 |
짐을 다 챙기고 나니 8시 15분 전이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평상시에 입던 |
330 |
유니폼을 입었다. 회색 바지, 파란색 셔츠, 가죽 잠바, 권총집이 달려 있는 가죽벨트, |
331 |
회색 모자. 그런 다음 비둘기와 마주칠 경우를 대비하여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
332 |
생각만 해도 정말 몸서리가 처지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그의 몸과 접촉하는 |
333 |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다리 복숭아뼈를 쫀다든지, 퍼덕거리며 날다가 날개 부위가 |
334 |
그의 손이나 목에 닿는다든지, 심지어 갈퀴 발톱처럼 벌어진 그 발로 그의 몸 위에 |
335 |
내려앉는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벼운 단화를 신지 않고, 보통 때라면 |
336 |
대개 1월이나 2월에 신고 다녔던 것으로, 바닥이 새끼양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목이 |
337 |
길며 가죽이 억센 장화를 신었다. 거기에다가 겨울 외투를 꺼내 입고 단추를 위부터 |
338 |
아래까지 다 잠근 다음, 털목도리를 턱까지 바짝 닿도록 두르고, 손은 속에 털이 있는 |
339 |
장갑을 껴 감췄다. 오른쪽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다. 그렇게 완전 무장한 모습으로 |
340 |
방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8시 7분 전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
341 |
모자를 벗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자를 다시 머리 |
342 |
위에 얹고 이마까지 푹 눌러쓴 다음, 가방을 문가로 들어다 놓았다. 오른쪽 손을 |
343 |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산을 손목에 걸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
344 |
왼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잡았다. 빗장을 여니 문이 조금 열렸다. 밖을 살짝 |
345 |
훔쳐보았다. |
346 |
비둘기는 더 이상 문 앞에 있지 않았다. 그것이 앉아 있었던 타일 위에는 5 프랑 |
347 |
짜리 동전 크기만한 초록색 에메랄드빛 똥과 문 사이로 부는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
348 |
작은 흰색 깃털이 보였다. 조나단은 속이 몹시도 메슥거렸다. 당장 문을 도로 |
349 |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의 가장 솔직한 심정은 바깥의 그 |
350 |
혐오스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안전한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 |
351 |
순간 그는 새똥이 단지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 여러 곳에 있는 것을 |
352 |
보았다. 그의 시야에 잡히는 복도 전체가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으로 |
353 |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역질 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자 |
354 |
역겨움이 더 심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이상한 반응이 생겼다. 만약에 새똥이 |
355 |
하나만 있고 깃털도 하나뿐이었다면 그는 필경 뒷걸음질 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
356 |
닫고 영원히 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전체 복도를 오물로 더럽힌 |
357 |
이상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새로운 용기가 |
358 |
생겨났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
359 |
이제야 비로소 비둘기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1.5 미터쯤 떨어진 복도 맨 끝 구석에 |
360 |
웅크리고 있었다.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고, 조나단도 그쪽으로는 아주 |
361 |
잠시 동안만 시선을 던졌기 때문에 그것이 잠들었는지, 깨어났는지, 아니면 눈을 뜨고 |
362 |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그가 알고 싶지 않은 |
363 |
것들이기도 했다. 아^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
364 |
들었다. 전에 언젠가 열대 지방에서 사는 동물에 관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동물들, |
365 |
예를 들어 오랑우탄 같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면 공격한다는 |
366 |
것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
367 |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비둘기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
368 |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조나단은 비둘기가 거기 없는 것처럼, 혹은 적어도 그것을 보지 |
369 |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
370 |
시푸르뎅뎅한 똥 사이로 가방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복도 쪽으로 끌어냈다. |
371 |
그런 다음 우산을 펴서 왼손으로 들고, 그것으로 방패처럼 가슴과 얼굴을 가린 채 |
372 |
바닥에 있는 똥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복도 쪽으로 걸어나와 등 뒤로 문을 |
373 |
닫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는 하였어도 |
374 |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는 |
375 |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덜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해서 어깨와 |
376 |
뺨 사이에 그것을 꼭 끼워 넣으려고 오른쪽 손으로 잡다가 그만 열쇠를 바닥에 |
377 |
떨어뜨리고 말았다. 똥 바로 옆자리였다. 하는 수 없이 허리를 구부려 그것을 꽉 잡고, |
378 |
가슴이 두근거려 세 번씩이나 열쇠 구멍을 제대로 찾지 못하다가, 열쇠가 구멍에 |
379 |
들어갔을 때는 연거푸 두 번이나 구멍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가에는 새가 |
380 |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5,5,5&. 어쩌면 그것은 우산이 벽에 |
381 |
긁히며 난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분명하고도 아주 짧게 |
382 |
마른 날개가 푸석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
383 |
열쇠 구멍에 있던 열쇠를 황급히 꺼내들고 가방을 움켜진 채 냅다 달음박질을 쳤다. |
384 |
활짝 펼쳐진 우산이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났고, 가방은 다른 방 문들에 마구 |
385 |
부딪치며 뒤뚱거렸고, 복도 중앙쯤에 있던 열린 창문틀이 길을 가로막았지만, 그는 |
386 |
막무가내로 앞쪽으로 내달음질쳤다. 그것도 너무나 무모하고 고집스럽게 하는 바람에 |
387 |
우산이 발기발기 찢겨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
388 |
아무것도 상관할 바가 없었다. 다만 멀리, 더 멀리, 더 멀리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
389 |
층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겨우 잠시 멈춰 서서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접었고, |
390 |
잠깐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침 햇살의 투명한 빛줄기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
391 |
있었고, 복도의 후미진 응달에 한 다발의 날카로운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
392 |
안을 그냥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우선 눈을 감았다가 굳이 다시 보려고 하자 |
393 |
그제서야 어두컴컴한 구석에 있던 비둘기가 몇 걸음 뒤뚱거리며 빠르게 걸어나와 다시 |
394 |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그의 방 바로 앞 자리였다. |
395 |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린 다음 그는 층계를 내려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
396 |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397 |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었다. 3층 계단 입구쯤에 |
398 |
이르자 갑자기 몸이 후끈거리며 더웠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 장화를 |
399 |
신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곳이 아래층 세대들의 부엌과 뒷계단이 |
400 |
연결되는 곳이었으므로 장보러 갔던 가정부가 나타나든가, 빈 술병을 내놓는 리고 |
401 |
씨와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었다. 또는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생겨서 라살르 부인이 |
402 |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 부인은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고, 마침 코를 |
403 |
찌를 듯한 커피 향기가 복도를 메우는 것으로 봐서 이미 일어나 있음이 분명했다. |
404 |
그러니 라살르 부인이 부엌 뒷문을 언제라도 열 수 있을텐데, 뜨거운 8월에 겨울 옷을 |
405 |
잔뜩 꾸려입은 괴팍스러운 조나단과 문앞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남을 |
406 |
기겁하게 만들어놓고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
407 |
설명이라도 하나 해야 될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한담? 거짓말을 하나 준비하기는 해야 |
408 |
할텐데 뭐라고 하지?) |
409 |
그의 옷차림에 맞을 성싶은 변명은 쉽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설프게 변명을 |
410 |
늘어놓아 보았자 그를 미쳤다고 볼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가 정말로 |
411 |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412 |
가방을 내려놓고 구두를 꺼낸 다음, 장갑과 외투와 목도리와 장화를 벗었다. 그런 후 |
413 |
구두를 신고 목도리와 장갑과 장화를 벗었다. 그런 후 구두를 신고 목도리와 장갑과 |
414 |
장화는 가방 속에 꾸겨 넣고, 외투는 팔에 걸쳤다. 그러고 나니 그가 생각했던 대로 |
415 |
남들 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복장이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빨래방으로 빨래를 |
416 |
가져가고, 외투는 세탁소에 맡기러 간다고 말을 둘러댈 수도 있는 있이었다. 그는 한결 |
417 |
가벼워진 마음으로 층계를 계속 내려갔다. |
418 |
뒷마당에서 집 청소와 관리를 하는 로카르 부인과 맞닥뜨렸다. 로카르 부인은 빈 |
419 |
쓰레기통을 작은 수레에 싣고 집 안으로 끌고 오려던 중이었다. 그 여자를 보자 |
420 |
가슴이 찔끔했고, 돌연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이미 모습을 들켰기 때문에 |
421 |
어두운 계단 밑으로 도로 들어갈 수도 없었으므로 그냥 내쳐 걸어야만 했다. |
422 |
"안녕하세요, 노엘 씨." |
423 |
의도적으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곁을 지나치려는 조나단에게 로카르 부인이 |
424 |
그렇게 안사말을 건넸다. |
425 |
"안녕하시오, 로카르 부인." |
426 |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로 그가 인사에 답했다. 그것뿐 더 이상 아무 말도 |
427 |
주고받지 않았다. 지난 10 년동안그렇게 오랜 시간을 로카르 부인이 그 집에 |
428 |
살아왔지만,그는 고작 아침 저녁으로 '안녕하세요, 부인'이란 말을 하거나, |
429 |
우편물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부인' 따위의 말만 해왔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로카르 |
430 |
부인에게 특별히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심통 사나운 |
431 |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여자는 전에 일했던 전임자와, 또 그 이전의 |
432 |
전 임자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집 청소를 하고 관리를 하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
433 |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나이가 40 대 후반이나 60 대 후반 사이에 어디쯤인지 통 |
434 |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복도를 걸을 때면 |
435 |
뚱뚱한 몸짓으로 약간 절룩거리며 걸었고, 백지장처럼 허연 혈색에다 곰팡이 냄새 |
436 |
같은 것을 풍기기도 했다. 쓰레기통을 집 밖으로 끌고가거나 혹은 다시 끌고들어오는 |
437 |
일, 아니면 계단을 청소하거나 잠깐 시장을 보러 나가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길과 |
438 |
마당 사이에 있고, 네온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숙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
439 |
바느질을 하거나, 다림질을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거나, |
440 |
약쑥으로 만든 술을 마시는 등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
441 |
생활을 했다. 정말로 로카르 부인에게 특별한 반감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렇게 |
442 |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 |
443 |
사실이었다. 그들이 직업상 늘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의 눈초리로 보기 |
444 |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카르 부인은 유독 조나단을 특별히 끈덕지게 감시하는 특기를 |
445 |
갖고 있었다. 로카르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게 두는 사람은 한 명도 |
446 |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
447 |
만큼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에서 의자에 앉아 |
448 |
있다가주로 이른 오후 시간이나 저녁식사 시간 후에,잠깐 졸다가도, |
449 |
누군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그 즉시 눈을 뜨고 누가 그랬는지 |
450 |
쳐다보곤 했다. 일찍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로카르 부인처럼 조나단의 |
451 |
행동거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사실 친구도 없었다. 또 은행에서의 |
452 |
그의 존재는 한낱 업무상 비치해 둔 물품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객들은 |
453 |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그냥 은행의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슈퍼마켓이나, |
454 |
거리에서나, (마지막으로 탔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버스에서도 그의 |
455 |
익명성은 다른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질 수 있었다. 오직 유일하게 로카르 |
456 |
부인만큼은 그를 보면 꼬박꼬박 아는 척을 했고, 날마다 적어도 두 번은 어설프게나마 |
457 |
관심을 표명해 왔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그의 신상에 생기는 작은 변화들은 로카르 |
458 |
부인에게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옷을 입고 있다든가, 1주일에 셔츠를 |
459 |
몇 번 갈아입는다든가, 머리를 감았다든가, 저녁 식사용으로 무엇을 사가지고 |
460 |
돌아왔다든가, 편지를 받았는지와 또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받았다던가 하는 |
461 |
따위들이었다. 그래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조나단이 로카르 부인을 인간적으로 탐탁치 |
462 |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그 여자의 집요한 시선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
463 |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직업적 의무감 때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바이기는 |
464 |
하였지만, 어쨌든 그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무언의 비난을 받는 듯한 느낌이 |
465 |
들어서, 그 곁을 지나려면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나갔건만,잠깐씩 뜨거운 |
466 |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
467 |
(빌어먹을, 도대체 나를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
468 |
감시를 받아야 되는 거지? 이제는 제발 못 본 척 해주어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둘 |
469 |
수는 없는 거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을 못살게 하는거지?) |
470 |
더군다나 아침에 큰 사건을 이미 치르고 난 뒤라서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있었고, |
471 |
자기 자신의 한심스러운 사정이 짐가방과 겨울 외투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기 |
472 |
때문에 로카르 부인의 눈길이 유달리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노엘 |
473 |
씨'라고 했던 인사말이 괜스레 대단한 야유로 들리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
474 |
늘 마음속에 잘 다독거려 둘 수 있었던 뜨거운 분노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도록 치밀어 |
475 |
오르면서 밖으로 표출되었고, 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
476 |
로카르 부인 곁을 이미 지나쳐서 자리에 우뚝 섰고, 가방을 내려놓은 후, 그 위에 |
477 |
외투를 걸쳐놓은 다음, 뒤쪽을 향해 돌아섰다. 로카르 부인의 성가시기 짝이 없는 |
478 |
눈초리와 주제넘은 인사말에 대해서 이제야말로 뼈 있는 한 마디를 해줘야겠다는 |
479 |
생각으로 돌아선 것이다. 로카르 부인에게로 걸어가면서도 조나단은 막상 무슨 말을 |
480 |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할 말도 |
481 |
해야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그 여자를 향해 걸어가는 |
482 |
그의 가슴 속에 여전히 이글거렸고, 용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
483 |
마당의 거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그가 길을 막고 섰을 때 로카르 부인은 쓰레기통을 |
484 |
제자리에다 갖다 놓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약 0.5 미터 |
485 |
정도 되었다. 로카르 부인의 핏기 없는 허연 얼굴을 조나단은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
486 |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포동포동하게 살찐 양볼의 피부는 오래되어서 하늘하늘거리는 |
487 |
실크처럼 몹시 부드러워 보였고, 갈색 눈망울은 가까이에서 보니까 얄궂은 호기심이 |
488 |
아니라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듯한 갸날픈 시선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색다른 |
489 |
느낌이지금까지 그가 로카르 부인에 대해서 품어왔던 인상과는 전혀 |
490 |
어울리지는 않았지만,조나단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
491 |
용무를 좀더 공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모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 다음 아주 |
492 |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
493 |
"부인! 할 말이 있습니다." |
494 |
(그 순간에도 그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
495 |
"무슨 일이죠, 노엘 씨?" |
496 |
이렇게 말하더니 로카르 부인은 머리를 약간 움찔하다가 비스듬히 뒤로 젖혔다. |
497 |
조나단은 그런 그가 새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겁먹은 작은 새 같았다. |
498 |
조나단은 자기가 했던 말을 냉담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
499 |
"부인,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
500 |
그런 다음 그는 아직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행동을 하나도 |
501 |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렇게 말끝을 맺고 있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도 |
502 |
놀라워했다. |
503 |
"내 방 앞에 새가 한 마리 있어요, 부인." |
504 |
그리고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
505 |
"비둘깁니다. 내 방 문 바로 앞 타일 위에 있어요." |
506 |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거의 무의식적으로 떠들고 있는 자신의 말에 |
507 |
갈피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명을 곁들였다. |
508 |
"그 비둘기가요, 부인. 7층 복도를 오물로 온통 더럽혀놨답니다." |
509 |
로카르 부인은 한쪽 발에 몸무게를 실었다가 다른 발에 옮겨놓는 짓을 몇 번 하고는 |
510 |
머리를 좀더 삐닥하게 뒤로 젖히며 말했다. |
511 |
"도대체 어디서 비둘기가 들어왔죠, 노엘 씨?" |
512 |
"나도 모르겠습니다." |
513 |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
514 |
"아마 복도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게지요. 창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그 |
515 |
창문은 꼭 닫아놔야만 합니다. 주택 관리 규정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
516 |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열어놓은 모양이네요." |
517 |
로카르 부인이 말했다. |
518 |
"날씨가 더워서요." |
519 |
"그랬는지도 모르죠." |
520 |
조나단이 말했다. |
521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항상 닫혀져 있어야 되는 겁니다. 특히 여름에는 |
522 |
더 하죠. 번개라도 치는 날엔 갑자기 꽝 하며 닫히다가 부서져버린다고요. 1962 년 |
523 |
여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어났었습니다. 유리를 갈아끼우는 데 그때 돈으로 백5십 |
524 |
프랑이나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주택 관리 규정에 그 창문을 |
525 |
닫아두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
526 |
그는 자꾸만 주택 관리 규정을 들먹이는 자기 자신이 우스워 보이리라는 생각이 |
527 |
들었다. 그리고 그 비둘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는지는 그가 굳이 알고 싶은 |
528 |
것도 아니었다. 사실 비둘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다. |
529 |
따지고 보면 그 끔찍스러운 사건이야 오직 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
530 |
그는 다만 로카르 부인의 성가신 시선에 대해서 느낀 분풀이만 하고 싶었을 뿐, 다른 |
531 |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첫마디로 이미 표현된 것 같았다. |
532 |
이제는 격분이 다 가셔버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
533 |
"비둘기를 다시 내쫓고, 창문도 닫아놓아야지요." |
534 |
로카르 부인은 이 세상에서 그처럼 쉬운 일이 없고, 그렇게만 하면 다시 모든 것이 |
535 |
제대로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나단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는 로카르 |
536 |
부인의 갈색 눈동자 속으로 자신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 갈색의 |
537 |
끈끈한 늪 속에 하마터면 빠져 죽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져서, 그곳을 |
538 |
빠져나오려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다시 되찾아야 될 것 같아서 |
539 |
헛기침을 해댔다. |
540 |
"에, 그러니까." |
541 |
그는 말을 시작하고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
542 |
"그러니까, 새똥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시푸르뎅뎅한 똥이요. 깃털도 있고요. |
543 |
복도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니까요. 그게 제일 큰 문젭니다." |
544 |
"그거야 그렇겠죠, 노엘 씨" |
545 |
로카르 부인이 말을 이었다. |
546 |
"물론 복도도 깨끗하게 청소해야 되지요. 그렇지만 우선 먼저 누군가가 비둘기를 |
547 |
내쫓아야겠네요." |
548 |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
549 |
"그래요, 맞아요."하면서도 그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꿍꿍이 속이지? 도대체 |
550 |
뭘 바라고 있는 거야? 왜 하필이면 누군가가 비둘기를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지? 혹시 |
551 |
날 보고 비둘기를 내쫓으라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차라리 자기가 |
552 |
로카르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553 |
"네, 맞^습^니^다." |
554 |
그가 말을 계속 더듬거렸다. |
555 |
"누군가 누군가가 그걸 내쫓아야지요. 내가 진작부터 그걸 몰아내고 |
556 |
싶기는 하였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바쁘거든요. 보시다시피 오늘 세탁소에 |
557 |
빨래를 맡겨야 하고, 그런 다음 직장으로 가야 하거든요. 몹시 바쁘지요, 부인. 그래서 |
558 |
그 비둘기를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단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부인한테 일러줄 |
559 |
생각이었지요. 특히 그 똥들 때문에요. 비둘기 오물이 복도를 온통 더럽혀놓은 것이 |
560 |
제일 큰 문제고, 또 그것은 주택 관리 규정에도 어긋나는 거니까요. 주택 관리 규정에 |
561 |
보면 복도나 층계나 화장실은 언제나 깨끗해야 된다고 적혀 있거든요." |
562 |
그는 자기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말을 얼버무렸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 |
563 |
없었다. 거짓말이 그에게는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고, 또 그것은 그가 감추고자 했던 |
564 |
유일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가 절대로, 결코 비둘기를 몰아낼 수 없으며, 그 반대로 |
565 |
오히려 비둘기가 오래 전에 그를 내쫓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
566 |
있었다. 설령 로카르 부인이 그의 말에서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
567 |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어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후끈 |
568 |
달아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며, 양볼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
569 |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570 |
로카르 부인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정말로 아무것도 |
571 |
눈치채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
572 |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노엘 씨. 틈나는 대로 내가 처리할께요." |
573 |
그 말만 해놓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신발을 질질 끌며 조나단의 주의를 빙 돌아서 |
574 |
숙소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쑥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
575 |
조나단은 그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그를 비둘기로부터 구출해 줄 수 |
576 |
있을 거라는 한가닥 희망마저, 화장실로 훌쩍 들어가버린 로카르 부인의 무심한 |
577 |
뒷모습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아무것도 처리하지 |
578 |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았다. |
579 |
(아무 것도 안할 거야. 꼭 그 여자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집 |
580 |
안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인데. 층계와 복도에 비질을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공동 |
581 |
변소를 청소하라는 책임은 있지만 비둘기를 내쫓을 의무는 없잖아? 오후에 술을 |
582 |
마시면 아무리 늦어도 그때쯤엔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거야. 지금, 바로 이 |
583 |
순간에 잊지 않았다면.) |
584 |
조나단은 지점장 대리 빌망 씨와 출납 계원 로크 부인이 출근하기 정확히 5분 전인 |
585 |
8시 15분 정각에 은행에 도착했다. 그들은 함께 은행 문을 열었다. 조나단은 겉에 |
586 |
있는 셔터를 올렸고, 로크 부인은 바깥쪽의 방탄 유리문을 열었으며, 빌망 씨는 안쪽의 |
587 |
방탄 유리문을 열었다. 그런 다음 조나단은 빌망 씨와 함께 열쇠로 비상 경보기를 |
588 |
풀었고, 로크 부인과는 지하로 통하는 비상문의 이중 자물쇠를 열었다. 비상문 안으로 |
589 |
로크 부인과 빌망 씨가 함께 들어가서 서로 맞물려야 열리게 되어 있는 열쇠를 |
590 |
사용하여 금고 문을 여는 동안, 조나단은 가방과 우산과 겨울 외투를 화장실 옆에 |
591 |
있는 옷장에 집어넣고, 안쪽 방탄 유리문에 차려 자세로 서서, 안팍 유리문을 |
592 |
자동적으로 교대하며 열리게 하는 두 개의 전자식 버튼을 조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
593 |
차츰 오고 있는 직원들을 통과시켰다. 8시 45분에 전 직원이 다 출근해서 각자 자기가 |
594 |
맡은 자리인 객장이나, 수납계나, 사무실 책상에서 준비를 갖췄고, 조나단은 정문 |
595 |
바깥쪽 대리석 계단 위에 있는 초소로 가려고 은행을 나왔다. 그의 실제적인 업무가 |
596 |
이제 시작되는 셈이었다. |
597 |
그의 업무라는 것은 그가 지난 30 년 전부터 아침에는 9시에서부터 오후 1시까지, |
598 |
오후에는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초소에 차려 자세를 하고 서 있거나, 맨 아래 |
599 |
계단으로 내려가서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9시 |
600 |
30분경과 4시 30분부터 5시 30분 사이에 지점장 뢰델 씨의 검은색 승용차가 |
601 |
들어오거나 나가게 되면 보초를 잠시 중단하곤 했다. 그때는 대리석 계단 위의 초소를 |
602 |
벗어나 은행 건물에서부터 약 12 미터 떨어져 있는 대문 쪽으로 달려가, 무거운 |
603 |
철제문을 열고, 손끝을 모자챙에 갖다 대는 예우로 인사를 깍듯이 한 다음, 승용차를 |
604 |
출입시켜야만 했다. 그 비슷한 경우는 이른 아침 일찍이나 늦은 오후 시간에 '브링크 |
605 |
현금 운반 서비스'의 방탄차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차가 와도 |
606 |
철제문을 열어주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되기는 하지만, 그때는 |
607 |
손을 쫙 펴고 모자챙에 손끝을 갖다 대는 깍듯한 경례가 아니라, 검지로 모자 끝을 툭 |
608 |
쳐 보이며 동료들끼리 나누는 가벼운 인사를 했다. 그것이 그가 하는 업무 내용의 |
609 |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똑바로 선채 앞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
610 |
그러다가 때로는 발을 내려다 보거나, 층계에 시선을 박거나,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 |
611 |
쪽을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계단 제일 아래칸으로 내려가서 일곱 발자국 |
612 |
왼쪽으로 걷다가, 다시 일곱 발자국 오른쪽으로 걸어가기도 했고, 아래에서 두 번째 |
613 |
계단으로 옮겨 가 거기에 서 있기도 했고, 간혹 가다가 햇빛이 너무 뜨겁게 비췰 때 |
614 |
열기 때문에 모자의 땀받이 띠에 땀이 너무 많이 배면 은행 건물 차양의 그림자에 |
615 |
가리워져 있는 제일 윗계단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모자를 잠깐 |
616 |
벗고, 소매끝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쳐내고는 다시 똑바로 서서, 시선을 고정한 채 |
617 |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
618 |
그는 자기가 정년 퇴직까지 총 7 만 5 천 시간을 그 세 개의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
619 |
보내게된다는 계산을 해 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파리 전체에서는 |
620 |
물론이거니와프랑스 전체에서도,같은 장소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
621 |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5 만 5 천 시간을 이미 그곳에서 보냈으니 벌써 |
622 |
그런 사람이 돼 있을 수도 있었다. 경비원으로 정식 고용된 사람이 시 전체로 보아도 |
623 |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은행들은 경비 |
624 |
용역 회사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그곳에서 파견되어 나와 양쪽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
625 |
찌뿌둥한 인상을 쓰는 시건방진 젊은이들을 문가에 세워두다가, 몇 주일 혹은 몇 달도 |
626 |
채 못되어 다시 그런 껄렁한 녀석으로 교채하기 일쑤였다. 소위 업무 수행상의 |
627 |
심리학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경비원이 근무를 같은 장소에서 너무 |
628 |
오래 계속하다 보면 주의력을 차츰 상실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주변에서 |
629 |
일어나는 사건에 둔감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점점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게되어 |
630 |
직책상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거였다. |
631 |
그가 보기에 그것은 다 쓸데없는 헛소리였다! 그런거라면 조나단이 그 따위 |
632 |
이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경비원의 주의력은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
633 |
다 상실되어 버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자신도 주변의 환경과 은행을 오고 |
634 |
가는 수백명의 인간들을 이미 근무 첫날부터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은행털이범이 |
635 |
일반 손님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따로 각별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
636 |
그리고 설령 강도를 발견하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고 하더라도강도가 은행 |
637 |
경비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작이 대단히 민첩하기 때문에,경비원이 |
638 |
권총을 뽑아 안전핀을 열기도 전에 총에 맞아 죽을 것이 너무나도 뻔했다. |
639 |
마치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 스핑크스에 관한 것을 |
640 |
언젠가 한 번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이었다. 뭔가 |
641 |
행동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다만 서 있음으로 해서 역할을 다 하는 |
642 |
의미에서 그랬다. 그것만이 강도짓을 하려고 음모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
643 |
도구였다.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라고 스핑크스가 도굴범에게 말할 것 같았다. |
644 |
'내가 너를 막을 수는 없지만, 넌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네가 만약 그런 |
645 |
무엄한 짓을 한다면, 신의 복수와 파라오의 혼령이 네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반면 |
646 |
경비원은 이렇게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난 너를 막을 |
647 |
수는 없지만, 네가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넌 나를 총으로 쏴야만 할테고, 법정의 |
648 |
복수는 살인에 대한 유죄 선고로 네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
649 |
물론 조나단은 스핑크스가 경비원보다 더 위협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것쯤은 |
650 |
알고 있었다. 신이 복수할 것이라는 말을 경비원이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651 |
그리고 설령 도굴범이 경고에 개의치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스핑크스에게는 |
652 |
아무런 위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엇다. 현무암의 커다란 바위 |
653 |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고, 금속으로 주조되어 있거나, 단단하게 벽돌로 쌓여 있으므로 |
654 |
도굴범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5천 년은 더 버틸 수 있기 |
655 |
때문이다. 그런 반면 경비원은 은행 강도를 당하는 날엔 불과 5초 만에 목숨을 |
656 |
잃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스핑크스와 경비원이 서로 |
657 |
권위를 어떤 도구로 나타내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일맥 |
658 |
상통하다고 느꼈다. 그로 하여금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만드는 그런 상징적인 권위에 |
659 |
대한 자각만이 어떤 주의 집중력이나, 무기나, 방탄 유리보다도 더한 힘과 인내를 |
660 |
부여해 주었고, 그것만으로 조나단 노엘은 무려 30 년도 넘는 시간을 은행 앞 대리석 |
661 |
계단 위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좌절감도 없고, 추호의 불만도 없고, 오늘 그 |
662 |
순간까지 찌뿌둥한 얼굴 한 번 하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다. |
663 |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오늘만큼은 조나단도 스핑크스적인 평화를 얻는 일이 |
664 |
결코 쉽지 않았다. 채 몇 분이 흐르기도 전에 발바닥에 몸무게가 다 쏠리는 듯 묵직한 |
665 |
압박감이 느껴졌고, 몸무게를 한쪽 발에 실었다가 다시 다른 발로 바꾸는 일을 |
666 |
반복하다가 약간 비틀거리는 바람에 이제까지 늘 무게 중심을 반듯하게 세워왔던 |
667 |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옆으로 잔 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그리고 갑자기 허벅지와 |
668 |
옆구리와 목덜미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한참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겨울에 가끔 |
669 |
그랬던 것처럼 말라서 까칠까칠해진 듯이 이마가 근질근질거렸다. 그러나 실제 날씨는 |
670 |
몸시 더웠다. 9시 15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기 어려울 만큼 후끈거렸고, 이마는 |
671 |
벌써 땀에 흠뻑 젖었다. 보통 때라면 11시 반쯤이나 돼야 그렇게 되었을텐데 |
672 |
팔, 가슴, 등, 허리, 다리 아랫부분, 살갗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마구 가려웠고 그냥 |
673 |
사정없이 박박 긁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경비원으로서 공공 장소에서 할 |
674 |
만한 일은 못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가슴 |
675 |
쪽으로 확 뿜어도 보고, 등을 굽혔다가 다시 펴기도 해보고,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도 |
676 |
해보면서 그런 식으로 입고 있는 옷을 들썩거려 옷으로 몸을 문질렀다. 그렇게 이상한 |
677 |
몸짓으로 몸을 들썩거리는 동안 조금씩 옆걸음을 치며 잡으려고 했던 몸무게 중심을 |
678 |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는 뢰델 씨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9시 |
679 |
반까지는 한자리에 고정한 채 서서 경비를 보던 습관을 무시하고 하는 수 없이 일곱 |
680 |
발자국씩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일곱 발자국 오른쪽으로 가며 앞뒤로 오가는 순찰 |
681 |
경비 자세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두 번째 계단의 가장자리에 |
682 |
붙들어매고, 수레바퀴처럼 궤도 위의 일정한 구간을 왔다갔다함으로써, 계단 디딤돌의 |
683 |
모서리에 잡히는 단순하고 매번 똑같은 형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하여, 몸이 |
684 |
무겁게 느껴지는 것과 살갗이 가려운 것과 육신과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자신의 |
685 |
처지를 잊으려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 |
686 |
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687 |
수레바퀴는 자꾸만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그 괘씸한 모서리는 |
688 |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것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 나뒹구는 찢겨진 |
689 |
신문조각이라든가, 파란색 양말을 신은 발이라든가, 여자들의 뒷모습이라든가, 빵을 사 |
690 |
넣은 시장 바구니라든가, 바깥 방탄 유리문의 손잡이라든가, 길 건너 까페의 불이 |
691 |
번쩍거리는 빨간색 마름모꼴 담배 판매대라든가, 자전거라든가, 밀짚 모자라든가, |
692 |
사람들의 얼굴이라든가 어떤 곳을 보더라도 그가 방향 감각을 잡을 수 있도록 |
693 |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을 만한 마땅한 새 볼거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른쪽에 보이는 |
694 |
밀짚 모자에 눈의 초점을 맞추자마자, 버스가 지나가며 그의 눈길을 왼쪽 길을 따라 |
695 |
내려가도록 만들었고, 그곳에서 몇 미터 아래에 있는 흰색 스포츠카를 바라보려고 |
696 |
하면, 그것이 다시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그의 시선을 몰았으며, 그 사이에 밀짚 |
697 |
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곤 하였다. 지나가는 수많은 군중의 무리와 수많은 |
698 |
모자들 사이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려보다가 전혀 다른 모자에 매달려 있는 |
699 |
장미를 쳐다보게 되고, 그것에서 눈을 떼어 마침내 다시 계단의 디딤돌 모서리에 |
700 |
시선을 떨구어도 보았지만, 마음의 안정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이 점에서 |
701 |
저 점으로, 이 얼룩에서 저 얼룩으로, 이 선에서 저 선으로 마구 헤맬 뿐이었다. |
702 |
오늘은 마치 가장 뜨거운 7월 오후에나 느껴볼 수 있음직한 더위로 대기가 아른거리는 |
703 |
것 같았다.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시야를 가렸다. 집과 지붕의 선과 용마루의 윤곽들이 |
704 |
눈이 부시도록 날카롭게 잡혀오면서도, 동시에 끄트머리가 풀어헤쳐진 것처럼 |
705 |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수구 뚜껑 가장자리와 마름모꼴의 보도 블록 사이의 |
706 |
흠이전에는 자로 그은 듯 반듯해 보였는데,번득거리며 곡선으로 |
707 |
너울거렸다. 그리고 오늘따라 여자들은 모두들 눈에 확 띄는 진한 색깔의 옷을 입고 |
708 |
있는 듯 열기를 내뿜으며 지나갔고, 그것은 그의 눈길을 꼭 붙들어주지도 않았다. |
709 |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또렷하게 주시할 수 있는 것도 |
710 |
없었다. 모든 것이 흔들흔들거렸다. |
711 |
시력 때문일 거라고 조나단은 생각했다. 밤 사이에 근시안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
712 |
안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안경을 써본 적이 있었다. 도수가 아주 |
713 |
높았던 것은 아니고, 좌우가 마이너스 0.75 디옵터였다. 이제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든 |
714 |
마당에 시력이 다시 근시안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이가 들면 근시안적인 |
715 |
증상은 사라지고, 오히려 원시안이 된다는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에게 |
716 |
지금 나타나는 증상은 전형적인 근시가 아니라서 안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인지도 |
717 |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내장이라든가, 녹내장이라든가, 망막 박리라든가, |
718 |
안암이라든가, 뇌에 종양이 있어서 그것이 시신경을 자극한다든가. |
719 |
그런 몹쓸 사념에 너무나 몰두해 있던 나머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여러 번 |
720 |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듣지 못했다. 겨우 너더댓 번째가 되어서야경음기가 |
721 |
한참 울고 있을 때,비로소 그것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으로 고개를 들었다. |
722 |
뢰델 씨의 승용차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경적 소리가 |
723 |
울렸고,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정문 앞에 뢰델 |
724 |
씨의 차가 멈춰서 있다니!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을 놓쳤던 적이 아직까지 한 |
725 |
번도 없었다. 평상시 그는 그쪽을 쳐다볼 필요도 없었고,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알고 |
726 |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오고 있음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잠자다가도 뢰델 씨의 |
727 |
승용차가 다가오면 개처럼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
728 |
뛰었다기 보다는너무나 서두르다가 넘어질 뻔하면서,정신없이 돌진해 |
729 |
가서 철제문을 따고, 옆으로 민 다음, 경례를 한 채 그것을 통과시켰다. 가슴이 마구 |
730 |
방망이질을 쳐댔고, 모자챙에 붙인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731 |
대문을 닫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되돌아 왔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
732 |
(뢰델 씨의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그는 자기 자신조차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
733 |
듯이 괴로움으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
734 |
(뢰델 씨의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못 본거야. 끝장난 거야. 의무를 |
735 |
내팽개친 거야. 넌 눈만 멀은 것이 아니야. 귀도 먹었어. 넌 이제 형편없이 |
736 |
늙어버렸어. 더 이상 경비원 노릇도 할 수가 없어.) |
737 |
대리석 제일 아래 계단이 있는 곳까지 가서 그것을 간신히 오른 후, 다시 자세를 |
738 |
잡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그는 곧 감지할 수 있었다. |
739 |
어깨를 반듯하게 추스릴 수가 없었고, 팔은 바지 옆 봉제선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그런 |
740 |
자기 자신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우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
741 |
하염없는 시름에 빠진 채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길 건너 |
742 |
까페를 쳐다보았다. 눈 앞이 아른거리던 현상은 이제 나타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
743 |
것들이 다시 반듯하게 일직선을 이뤘고, 세상은 또렷하게 보였다. 자동차 소리, |
744 |
여자들의 구두굽 소리가 이제 다 들렸다. 시력이나 청력 그 어떤 것도 조금치도 |
745 |
손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그는 |
746 |
기력이 없었다. 몸을 돌려 둘째와 셋째 계단을 오른 다음 바깥 방탄 유리문 곁의 기둥 |
747 |
앞 그늘에 바짝 붙어섰다. 그는 뒷짐을 지고, 기둥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 다음 30 |
748 |
년간의 직장 생활중 처음으로 손과 기둥에 몸을 의지하고 슬그머니 등을 기댔다. 잠깐 |
749 |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
750 |
점심 시간에 그는 가방과 외투와 우산을 옷장에서 갖고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성 |
751 |
플라시드 가로 가서 주로 학생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묵는 작은 호텔로 갔다. 제일 |
752 |
값이 싼 방을 요구했고, 하룻밤에 55 프랑이라는 방을 미리 보지도 않고 돈을 지불한 |
753 |
다음 짐을 프런트 데스크에 맡겼다. 가두 판매대에서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과 |
754 |
우유를 사서 봉 마르셰 백화점 앞의 작은 광장에 있는 부시코 공원으로 갔다. 그는 |
755 |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
756 |
그의 벤치로부터 두 번째 떨어진 벤치에 거지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거지는 |
757 |
백포도주병을 허벅지 사이에 끼운 채 바케트 빵 반쪽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바로 |
758 |
옆에는 훈제된 정어리 봉지가 있었다. 거지는 정어리를 한 마리씩 꼬리를 붙들고 |
759 |
꺼내어, 입으로 머리를 싹둑 잘라 뱉어내고는 나머지를 한 입에 다 구겨넣었다. 그런 |
760 |
다음 빵을 한 입 베어먹고, 술병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
761 |
트림을 했다. 조나단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겨울이면 그는 언제나 백화점의 |
762 |
창고로 통하는 길목이나, 백화점의 지하 보일러실 위쪽 창살에 앉아 있곤 했다. |
763 |
여름에는 세브르 가의 상점들 앞이나, 외국인 선교단 건물 앞이나, 우체국 옆에 앉아 |
764 |
있곤 했다. 그 근방에서 그도 조나단처럼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
765 |
조나단은 30 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에 찬 질투심이 기억났다. 그런 |
766 |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었다. 날이면 |
767 |
날마다 조나단은 9시 정각에 근무를 시작해야만 했지만, 그 거지는 10시나 11시에 |
768 |
모습을 나타내곤 했었다. 조나단이 빳빳한 자세로 서 있어야 되는 반면, 그는 골판지 |
769 |
가장자리에 방자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곤 했었다. 조나단이 날이 가고, 달이 |
770 |
가고, 해가 가도록 목숨까지 바치면서 은행을 지킴으로써 생활비를 피땀 흘려 |
771 |
벌어들인 반면, 그 작자는 뭇사람들의 동정심과 적선에 빌붙어서 다른 아무 짓도 하지 |
772 |
않았다. 그래도 거지는 한번도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고, 모자가 텅 비어 |
773 |
있어도 마찬가지였으며, 무슨 고통을 받고 있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지겨워하는 |
774 |
구석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언제나 그에게서는 자신만만함과 자기 만족이 |
775 |
솟구쳐올랐고, 그것은 자유로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버젓이 나타나 남들의 눈길을 |
776 |
빼앗곤 하였다. |
777 |
옛날에 딱 한 번, 60 년대 중반의 어느 가을 날에 조나단이 뒤팽 가에 있는 |
778 |
우체국을 막 들어가려고 하다가 골판지 가장자리에 비닐 봉지와 동전을 몇 개 |
779 |
받아놓은 그 유명한 모자 옆에 세워 둔 술병을 하마터면 넘어뜨릴 뻔한 일이 있었다. |
780 |
그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거지를 찾아보았었다. 그 자가 보고 싶어서 그랬던 |
781 |
것이 아니라, 술병과 비닐 봉지와 골판지가 있는 자리의 중앙에 그가 빠지고 없었기 |
782 |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길 건너편 주차된 차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
783 |
거지가 보였고, 급한 용변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지는 바지를 |
784 |
무릎까지 끌어내린 채 하수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조나단 쪽을 향하고 있던 |
785 |
엉덩이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고,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의 |
786 |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밀가루처럼 허연 엉덩이에는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고, |
787 |
붉으스레한 부스럼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살가죽이 벗겨져서 마치 몸져누워 |
788 |
지내는 노인네의 궁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거지의 나이는 그때 조나단의 |
789 |
나이보다 훨씬 많지도 않았고, 서른이나, 기껏 많아 보았자 서른다섯밖에 안 됐었다. |
790 |
어쨌든 그런 지저분한 엉덩이에서 갈색 죽 같은 물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이 |
791 |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면서 신발 주위에서 물결쳤고, 밑으로 |
792 |
힘차게 떨어지던 파편들은 양말과 종아리와 바지와 셔츠 그리고 모든 것들은 더럽히며 |
793 |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
794 |
너무 비참했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기 때문에 조나단은 아직도 그때를 |
795 |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고 난 다음 그는 우체국 안으로 |
796 |
도망치듯 들어가 전기 요금을 냈고,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우체국에서 시간을 더 |
797 |
보내려는 생각에 우표도 샀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는 우체국을 나설 때 거지의 |
798 |
모습과 맞닥뜨리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막상 밖으로 나올 때는 눈을 질끈 |
799 |
감았다가 땅바닥만 쳐다보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길 건너편을 보지않으려고 뒤팽 가가 |
800 |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었다. 그리고 뭐 잃어버린 것도 없으면서 술병과 골판지와 |
801 |
모자가 있는 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굳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 세르슈 미디 가와 |
802 |
라스파유 가를 빙 도는 우회로를 선택했었고, 마침내 플랑슈 가에 있던 그의 안전한 |
803 |
도피처인 방으로 갔었다. |
804 |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조나단이 거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부러움이 흔적도 |
805 |
없이 사라졌다. 물론 문이나 가끔씩 열어주거나, 지점장의 차를 향해 경례를 붙이는 등 |
806 |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휴가도 조금 받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으면서도, 월급의 |
807 |
대부분은 세금이니, 임대료니, 사회 보장 보험 분담금 등으로 흔적도 없이 뺏기며 |
808 |
인생의 3분의 1을 은행 앞에 서서 허송하는 일로 지내는 노릇이 도대체 의미가 있는 |
809 |
일인지에 대한 회의를 종종 품기도 했었다. 그런 따위들이 의미가 있는 |
810 |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뒤펭 가에서 보았던 끔찍스러운 모습으로 그에게 만큼은 |
811 |
확실하게 쥐어졌다.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 노릇이라도 하고 있었기 |
812 |
때문에 적어도 공공 장소에서 자기의 엉덩이를 노출시키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
813 |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만 놓고 보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로 생각되었던 |
814 |
것이다. 남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볼 수밖에 없는 사정보다 |
815 |
더 비참한 일이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밑으로 끌어내린 |
816 |
바지춤과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세와 어쩔 수 없이 망칙하게 벗고 있는 것보다 더 |
817 |
굴욕적인 것은 정말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부득이하게 보는 용변을 세상 |
818 |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밖에 없는 처지보다 더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
819 |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부득이하게 보는 용변! 그 말 자체가 이미 모든 괴로움을 다 |
820 |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정으로 볼 일을 |
821 |
봐야만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이 그 일을 대충 할 수 |
822 |
있는 거였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만이라도 필요한 |
823 |
법이었다. 이를테면 시골에서는 숲으로 들어간다거나, 들판에서 그런 입장이 되면 |
824 |
풀숲으로라도 간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밭고랑을 찾아가거나, 혹은 저녁 어스름한 |
825 |
어둠이 들 때까지 기다리거나, 정 그것도 아니면 사방 1 킬로미터 내에서는 남의 눈에 |
826 |
잘 뜨이지 않는 제방으로라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다면 도시에서는 |
827 |
어떻게 해야 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도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828 |
한번도 제대로 어두워지지 않는 도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시 후미진 곳을 |
829 |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호기심 어린 남의 이목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는 곳에서는 |
830 |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도시에서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빗장과 열쇠로 잠금 |
831 |
장치가 잘 되어 있으며, 칸막이가 된 공간을 사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
832 |
급한 용변을 보기에 최고로 안전한 그런 장소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데서나 |
833 |
자유를 즐기지만 사실은 제일 불쌍하고 애처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그는 들었다. 돈을 |
834 |
얼마 들이지 않고서도 조나단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누더기 같은 바지와 |
835 |
남루한 잠바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었다. 소설 같은 상상력을 |
836 |
다 동원한다면 골판지 구석에 구부리고 새우잠을 잔다든가, 자기 자신만의 공간이 |
837 |
되어야 할 가정을 어느 구석진 곳이나, 보일러 실 곁이나, 지하철 역의 계단 밑에서 |
838 |
간신히 꾸린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용변을 |
839 |
보고 싶을 때 문 뒤로 슬쩍 사라질 곳이 이렇게 큰 도시에 없다면,비록 복도의 |
840 |
공동 변소라고 할지라도,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
841 |
있는 그런 중요한 자유를 잃어버린다면 다른 모든 자유가 다 쓸모없는 것이라는 |
842 |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그런 인생은 더 이상 의마가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죽는 |
843 |
것이 그보다 나았다. |
844 |
인간적인 자유가 적어도 복도의 공동 변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
845 |
것과 그런 필요 불가결한 자유를 자기가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마음속 |
846 |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이 생각할수록 |
847 |
천만다행스러웠다! 그것은 어떤 면으로 보나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
848 |
없지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는 |
849 |
은행 문 앞에서 다리에 힘을 더 꽉 주고 서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
850 |
금속으로 주조된 동상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거지의 마음속에 있으리라고 |
851 |
짐작해 왔던 자신만만함과 긍지가 어느새 쇳물처럼 녹아서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와, |
852 |
그의 내부에 철판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고, 또 그것은 그를 그만큼 강하게 만들었다. |
853 |
앞으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를 흔들리게 할 수 없으며, 그로 하여금 회의를 |
854 |
품게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스핑크스적인 평온함을 되찾은 거였다. |
855 |
거지를 보면어쩌다가 그와 맞부딪치거나, 아무데서나 앉아 있는 그를 |
856 |
보면,전체적으로 일컬어서 관용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감정, 구역질과 경멸과 |
857 |
애처로움이 뒤범벅이 된 미온적인 감정의 혼합체를 느낄 뿐이었다. 거지가 더 이상 |
858 |
그를 노엽게 하지도 않았다. 조나단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
859 |
오늘 부시코 공원에 앉아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을 뜯어먹고, 우유를 팩째 |
860 |
들고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거지는 그에게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평상시에 그는 |
861 |
점심 시간이면 집으로 갔었다. 불과 5분만 가면 집에 도착했다. 대개 오믈렛, 햄을 |
862 |
섞은 달걀 후라이, 치즈 가루를 뿌린 국수, 또는 전날 남아 있던 스프를 데우는 등 |
863 |
따뜻한 음식을 직접 만들었고, 거기에 샐러드를 곁들였으며, 커피도 한 잔씩 했다. |
864 |
점심 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는 일은 참으로 굉장히 오랜만의 |
865 |
일이었다. 사실 그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
866 |
그렇지만 오늘은 이미 방 값으로 55 프랑이나 지출해 버린 입장이었다. 그러니 |
867 |
식당으로 가서 오믈렛과 샐러드와 맥주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낭비 같았다. |
868 |
건너편 벤치에 있는 거지는 식사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정어리를 다 먹어치운 다음 |
869 |
빵과 치즈와 배와 과자도 먹었고, 포도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키고는 속까지 시원할 |
870 |
것 같은 트림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잠바를 돌돌 말아 베개를 만들어 그 위에 머리를 |
871 |
얹더니 배부르고 게으른 육신을 벤치의 길이대로 쭉 뻗고 오수를 즐길 자세를 취했다. |
872 |
그는 이내 잠이 들었다. 참새들이 팔딱거리며 다가와 빵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으며 |
873 |
뒤뚱 거렸다. 참새들을 따라 온 몇 마리 비둘기도 그의 벤치 가로 가서 뱉어낸 |
874 |
정어리의 머리를 까만 주둥이로 연신 쪼아댔다. 거지는 새들이 그래도 꿈쩍 안 했다. |
875 |
깊게 그리고 아주 평안하게 잠을 잘 뿐이었다. |
876 |
조나단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게 그를 쳐다보는 가슴에 이상한 불안감 |
877 |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 불안감은 과거에 느꼈던 그런 부러움이 아니라 경이감에서 |
878 |
비롯된 것이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나이 50이 넘도록 살 수 있었는지가 스스로 |
879 |
의문스러웠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살아오다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간경화증에 |
880 |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거나, 어쨌든 이미 옛날에 죽었어야 마땅했다. 그 대신 버젓이 |
881 |
살면서 대단한 식성으로 먹고, 마시고, 당당히 잠자고, 비록 헝겊을 대고 기운 |
882 |
바지지만 옷도 입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가 입고 있는 바지는 옛날 뒤팽 가에서 |
883 |
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수선을 하기는 하였어도 그런 |
884 |
대로 맵시가 있고 거의 유행에도 맞는 골덴 바지였다. 거기에다가 그의 면잠바를 함께 |
885 |
놓고 보면 세상에 썩 잘 어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어떤 확고한 인상을 주는 |
886 |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에 비하면 조나단은그의 경이감은 차츰 |
887 |
머리를 어지럽히는 신경질로 변해갔다,평생토록 착실했고, 단정했고, 욕심도 안 |
888 |
냈고, 거의 금욕주의자에 가까웠고, 깨끗했고, 언제나 시간을 잘 지켰고, 복종했고, |
889 |
신뢰를 쌓았고, 예의도 잘 지키며 살아왔건만 그리고 단 한푼이라도 스스로 |
890 |
일해서 벌었고, 전기세나 임대료나 관리인에게 주는 성탄절 보너스도 언제나 제 때 |
891 |
꼬박꼬박 현금으로 지불했으며 빚이라고는 진 적이 없고, 남에게 폐를 끼친 |
892 |
일도 없고, 병에 걸렸던 적도 없고, 사회 보장 보험금에 신세를 진 적도 없고 |
893 |
언제 그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마음이 평안한 작은 |
894 |
공간을 갖는 것 말고는 절대로, 결코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건만 쉰세 |
895 |
번째 되는 해에 어쩌다 큰 위기를 겪게 되어, 주도 면밀하게 세워두었던 인생의 |
896 |
계획을 몽땅 수포로 돌려버리고,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 되었으며, 당혹스러움과 |
897 |
두려움으로 기껏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 따위나 뜯어 먹고 있는 것이었다. |
898 |
그것은 분명히 두려움이었다! 잠들어 있는 거지를 보고 있던 그의 몸이 부들부들 |
899 |
떨리고 무서웠다. 자기도 벤치에 누워 있는 그 폐인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
900 |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 빈털털이가 되고, 저런 밑바닥 인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
901 |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확실해 보이는 |
902 |
것들이 완전히 부서지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궁금해졌다. (뢰델 |
903 |
씨의 승용차가 오는 것을 못 봤지.)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까지 한 번도 |
904 |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오늘 일어났어. 승용차를 못 |
905 |
본거야. 오늘은 자동차에 주의를 하지 못했으니, 내일은 근무중 다른 것들도 다 |
906 |
망각하게 되겠지. 철제문을 여는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해서 넌 다음 달에 문책성 |
907 |
해고를 당하고 말거야. 그러면 한번 실패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 |
908 |
새 직장도 못 구할 거야. 실업 수당으로는 입에 풀칠도 못 할 테고, 네 방은 |
909 |
그때쯤이면 비둘기가 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더럽히고 엉망진창을 만들어놓았을 |
910 |
테니 넌 그 방을 뺏겨버리고 말겠지. 호텔 숙박료는 기하학적인 숫자로 불어날테고, 넌 |
911 |
걱정 때문에 술을 마시고, 점점 더 많이 마시게 되고, 저금한 돈까지 다 술로 |
912 |
탕진하고, 술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병에 걸리고, 방탕해지고, 온몸에 이가 들끓고, |
913 |
타락하고,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마침내는 제일 값싼 여관에서조차 내쫓김을 당하는 |
914 |
신세가 되겠지. 그러면 넌 길로 나앉게 되어 빈털털이가 되고, 거리에서 잠도 자고, |
915 |
똥도 싸면서 완전히 끝장을 보게 될 거야. 조나단, 넌 올해 말이 되기도 전에 다 |
916 |
떨어진 누더기 옷을 걸치고 공원 벤치에 누워 있게 될 거야. 저기 저자처럼 말이야. |
917 |
그러면 저 폐인이 된 자가 너의 형뻘이 되는 거야!) |
918 |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는 경고하고 있는 듯한 잠자는 남자의 모습에서 시선을 |
919 |
돌리고, 마지막 남은 달팽이빵 조각을 한 입에 꿀꺽 삼켰다. 그 작은 조각이 위까지 |
920 |
내려가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달팽이가 기는 것처럼 천천히 식도를 따라 |
921 |
내려가다가, 어떤 때는 그냥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하였고, 마치 가슴패기에 못이라도 |
922 |
박는 것처럼 압박감에 통증이 몰렸다. 그 고약스러운 것 때문에 질식해 버릴 것 |
923 |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다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더니 마침내 밑으로 |
924 |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와 함께 격심한 통증도 사라졌다. 조나단은 숨을 깊게 |
925 |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
926 |
30분이나 남아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면 |
927 |
충분했다. 그곳이 그에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각별히 주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
928 |
바지 무릎 부분에 떨어져 있던 빵부스러기들을 손등으로 털어내고, 바지 주름도 다시 |
929 |
잡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지가 있는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갔다. |
930 |
세브르 가까지 다 갔는데 공원 벤치에 빈 우유 팩을 두고왔다는 생각이 머리에 |
931 |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벤치에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간다거나, |
932 |
쓰레기를 따로 모아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디를 가나 설치해 놓은 쓰레기통에 |
933 |
버리지 않고, 그냥 길바닥에 버리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
934 |
그는 이제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공원 벤치 등에 두고 그대로 온 적이 |
935 |
한번도 없었으며, 게으르거나 망각 때문에라도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
936 |
시시한 일은 그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필이면 |
937 |
많은 일이 잘되지 않은 불안한, 바로 오늘 같은 날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
938 |
않았다. 어차피 일은 꼬였고, 이미 바보 같은 행동도 저질렀고, 자기 일에 책임질 |
939 |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도 했고, 또 그런 자기 자신을 비사회적인 인간에 가깝다고 |
940 |
느끼기까지 하는 처지였다뢰델 씨의 자동차를 보지 못했다든가, 점심으로 공원 |
941 |
벤치에 앉아서 달팽이 모양의 빵이나 먹는다든가 하는 따위들이 바로 그런 |
942 |
짓들이었다!,만약 지금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유 팩을 그냥 놓고 오는 등의 아주 |
943 |
사소해 보이는 일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즉시 균형을 |
944 |
잃어버리고 처참하게 종말을 맞게 되는 처지를 어떤 것으로라도 막을 수 없을 것만 |
945 |
같았다. |
946 |
그는 결국 방향을 바꿔 공원 쪽으로 향했다. 멀리에서도 그가 앉아 있었던 벤치가 |
947 |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암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벤치 |
948 |
등받이 널빤지 사이로 하얀색 우유 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여간 다행스럽지가 |
949 |
않았다. 그의 무심함이 아직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제 |
950 |
그 고약스러운 실수를 감쪽 같이 없애버리면 될 것 같았다. 벤치의 뒤로 다가가서 |
951 |
그는 허리를 잔뜩 굽히며 왼손으로 우유 팩을 잡고, 대충 거기쯤에 가까운 쓰레기통이 |
952 |
있을 거란 생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휙 돌리는 순간비스듬히 아래쪽에서 뭔가 |
953 |
바지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하였지만, 워낙에 급작스럽게 |
954 |
생겨난 일이고, 이미 그 반대의 방향으로 몸을 똑바로 세우려는 동작중에 일어난 |
955 |
일이라서 그로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그때 크게 '찍' |
956 |
하는 아주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렸고, 바깥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란 것을 쉽게 |
957 |
짐작할 수 있는 한 줄기 바람이 왼쪽 넓적다리 살갗 위로 서늘하게 불었다. 잠깐 동안 |
958 |
그는 너무나 기겁을 한 나머지 차마 그쪽을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찍' 하는 소리가 |
959 |
아직도 그의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고, 그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기 때문에 단순히 |
960 |
바지만 찢겨진 것이 아니라, 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것처럼 그의 속살이 찢겨졌가나, |
961 |
벤치가 부서졌거나, 공원이 쫙 갈라져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끔찍스러운 '찍' |
962 |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나게 만든 장본인인 조나단을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 |
963 |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들은 뜨개질을 |
964 |
계속하였고, 할아버지들은 신문을 계속 읽었으며, 몇 명 안 되는 아이들은 여전히 |
965 |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놀았고, 거지는 잠자고 있었다. 조나단은 아주 천천히 |
966 |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찢겨진 길이가 약 12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것은 벤치에 |
967 |
뾰쪽하게 나와 있는 나사에 몸을 돌리면서 걸렸을 왼쪽 바지 주머니 끝에서부터 |
968 |
시작하여 넓적다리를 죽 타고 내려가 있었다. 그것도 바느질 선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 |
969 |
아니라 멋진 게버딘 근무복의 한복판을 가로 지르다가, 바지 주름 쪽을 향해 엄지 |
970 |
손가락 두 개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넓이로 직각을 이루며 찢어져 있었다. |
971 |
그래서 그냥 단순히 옷감이 찢겨진 것이 아니라 삼각형의 깃발처럼 펄럭거려 도저히 |
972 |
간과할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놓은 있었다. |
973 |
조나단은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아드레날린이라는 흥분제가 부신 |
974 |
수질로부터 분비되어, 육신의 극히 위험한 위기와 정신적인 압박감이 닥쳤을 때 생과 |
975 |
사를 가름하는 결투나 도피용으로 저장해 두던 몸 속의 마지막 저력을 움직이게 하기 |
976 |
위해서 피 속으로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바지만 |
977 |
찢겨진 것이 아니라 속살이 12센티미터나 상처를 입어서 그곳에서 피가 철철 |
978 |
흘러넘치는 것 같았고, 이제까지 내부적으로 다져놓은 순환의 틀 속에 잘 굴러갔던 |
979 |
인생이 그 상처 때문에 끝을 보게 되어 미처 손볼 겨를도 없이 마감되는 듯하였다. |
980 |
그러나 그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이 피를 흘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를 기적적으로 |
981 |
소생시켰다. 심장은 힘차게 뛰었고, 용기는 치솟았으며, 그의 머리는 아주 맑아져서 |
982 |
오직 한 가지 것에만 신경을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
983 |
(즉시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
984 |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
985 |
(이 구멍을 막을 수 있도록 지금 즉시 뭔가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너는 파멸하고 |
986 |
만다!) |
987 |
과연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에 대해 자문하는 그에게 해답도 금새 주어졌다. 그 |
988 |
환상의 물질 아드레날린은 그렇게 빨리 효과를 냈고, 두려움은 총명함과 실행에 옮길 |
989 |
수 있는 힘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단숨에 그는 그때까지 왼쪽 손에 들고 있던 우유 |
990 |
팩을 콱 구겨서 잔디밭이든 모랫길이든 상관도 안하고 아무 곳으로나 휙 집어던졌다. |
991 |
이제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넓적다리에 난 구멍을 가리고 정신없이 뛰기 |
992 |
시작했다. 뛰면서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왼쪽 발은 가능한 뻣뻣하게 하였고, |
993 |
오른손은 마구 휘저으면서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절뚝거리며 공원을 빠져나와 세브르 |
994 |
가로 갔다. 이제 시간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
995 |
바크 가 모퉁이에 있는 봉 마르셰 백화점 식료품부의 한 구석에는 여자 재단사가 한 |
996 |
명 있었다. 그가 그 여자를 본 것은 며칠 전이었다. 출입구 근처 바로 앞쪽, 사람들이 |
997 |
장바구니를 두는 곳이었다. 재봉틀 옆에 팻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는 그 내용을 |
998 |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잔느 토펠 수선 ,36^ 성심 성의껏 신속하게 옷 |
999 |
모양을 바꿔주거나 수선해 줌.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반드시 그 여자가 |
1000 |
그를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 가게도 점심 시간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
1001 |
아니, 점심 시간이라면 오늘 일이 너무 많이 꼬이게 되므로, 그 여자는 점심 시간에 |
1002 |
쉬지 말아야만 했다. 하루에 일이 그렇게 많이 꼬이는 것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
1003 |
없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안 됐다. 이처럼 딱한 처지를 당했는데 그런 일이 |
1004 |
있어서는 결코 안 됐다. 진실로 곤궁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행운이 찾아와 남의 |
1005 |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토펠 부인이 반드시 |
1006 |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를 도와주리라고 생각되었다. |
1007 |
토펠 부인은 자리에 있었다! 그는 식료품부를 들어서자마자 재봉틀 앞에 앉아서 |
1008 |
바느질을 하고 있는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토펠 부인은 정말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 |
1009 |
같았다. 점심 시간조차 성심 성의껏 신속하게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
1010 |
여자가 있는 쪽으로 쫓아가서 재봉틀 옆에 선 다음 넓적다리에 있던 손을 떼고 손목 |
1011 |
시계를 얼른 훔쳐 보았다. 시계는 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냈다. |
1012 |
"부인!" |
1013 |
토펠 부인은 빨간색 치마에 주름 잡는 일을 마치고 재봉틀을 끈 다음 옷감을 꺼내 |
1014 |
실을 끊으려고 바늘 끝을 이완시켰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조나단을 쳐다보았다. 그 |
1015 |
여자는 테가 굵고 진주빛으로 된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알이 겉으로 많이 |
1016 |
불거져 있어서 눈이 커다랗게 보였고, 눈두덩이가 움푹하게 파여 그늘진 웅덩이처럼 |
1017 |
보였다. 밤색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매끈하게 흘러내렸고, 입술은 은보라색 화장을 하고 |
1018 |
있었다. 나이가 40 대 후반이나 50 대 중반쯤 되었을 것 같았고, 풍기는 인상은 |
1019 |
유리알이나 카드를 통해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아낙네들과 같았다. 사실 미천하여 |
1020 |
'부인'이라는 호칭이 썩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이내 속마음을 |
1021 |
털어놓는 그런 여자들의 인상 같았다. 그리고 코 위에 걸쳐져 있던 안경을 조나단을 |
1022 |
제대로 보려고 위로 슬쩍 올리던 손가락은 뭉툭하고 소세지처럼 보이기는 하였지만, |
1023 |
그렇게 일을 많이 하는 와중에서도 손톱에 은보라색 매니큐어를 칠해놓아 왠지 |
1024 |
친밀감이 느껴지는 소박함을 풍기고 있었다. |
1025 |
"왜 그러세요?" |
1026 |
토펠 부인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 했다. |
1027 |
조나단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바지에 난 구멍을 손으로 가르키고 이렇게 물었다. |
1028 |
"고칠 수 있겠습니까?" |
1029 |
그 물음이 너무 거칠고, 아드레날린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들킬 것 |
1030 |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될수록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다시 덧붙였다. |
1031 |
"조금 찢겨져서 구멍이 났어요 재수가 없었죠. 이걸 어떻게 해볼 수 |
1032 |
있을까요?" |
1033 |
토펠 부인은 그 큰 눈으로 조나단을 보던 눈길을 떨구고, 넓적다리에 난 구멍을 |
1034 |
보더니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러자 밤색의 매끈한 머리카락이 |
1035 |
어깨에서부터 뒤통수까지 갈라졌고, 그 사이로 짧고 비곗살로 통통한 흰색 목덜미가 |
1036 |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코를 찌를 듯이 진한 화장품 냄새가 솟구쳐올라서, 조나단은 |
1037 |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목덜미 근처를 바라보던 시선을 슈퍼마켓 쪽으로 |
1038 |
멀리 돌려야만 했다. 잠시 동안 그는 상품 진열대, 냉장고, 치즈 판매대, 소세지 매장, |
1039 |
특별 서비스 코너, 피라미드 형으로 진열된 술병들, 야채 코너 등과 그 사이를 헤매고 |
1040 |
있거나, 쇼핑 차를 밀거나, 어린아이 손목을 질질 끌고가는 손님들, 판매원, 창고 직원, |
1041 |
계산대 직원, 또 그들과 함께 허둥지둥대며 소음을 유발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런 |
1042 |
그들 곁에 찢겨진 바지를 입고 사방을 샅샅이 쳐다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총체적인 |
1043 |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혹시 그 군중의 무리 속에 빌망 씨나 로크 |
1044 |
부인이나 심지어 뢰델 씨가 있다가 공공 장소에서 밤색 머리의 여자가 등을 잔뜩 |
1045 |
구부리고 조나단의 몸의 은밀한 곳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
1046 |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더군다나 찢겨진 부위의 |
1047 |
펄럭거리는 옷감을 이쪽저쪽으로 뒤집어 보고 있는 토펠 부인의 뭉툭한 손가락을 |
1048 |
넓적다리 살갗에서 느끼자 몸이 와르르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
1049 |
다행히 토펠 부인이 그 순간 넓적다리가 있는 아래쪽에서 윗몸을 일으키더니 의자에 |
1050 |
등을 기대며 앉았고, 사정없이 마구 뿜어대던 화장품 냄새도 가셔서, 조나단은 정신을 |
1051 |
어지럽게 만든 그 넓은 매장에서 눈길을 떼고, 크고 안경알이 도톰한 토펠 부인의 |
1052 |
친밀감 드는 안경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
1053 |
"어떻겠습니까?" |
1054 |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마치 의사 앞에서 무서운 진단이 내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
1055 |
환자처럼 불안해 하며 재차 물었다. |
1056 |
"어떻겠습니까?" |
1057 |
"괜찮겠어요." |
1058 |
토펠 부인이 말했다. |
1059 |
"밑에다 뭐만 대면 되겠어요. 바느질 자국이 조금 남기는 할 거^예요. 그렇게 안 |
1060 |
하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
1061 |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
1062 |
조나단이 말했다. |
1063 |
"바느질 자국 조금 남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렇게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을 |
1064 |
누가 세심히 쳐다보겠습니까?" |
1065 |
그렇게 말한 다음 재빨리 시계를 보니 2시 14분이었다. |
1066 |
"그러니까 하실 수 있다는 거죠?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거죠?" |
1067 |
"물론이에요." |
1068 |
그렇게 말하고 토펠 부인은 그것을 자세히 보느라고 밑으로 내려온 안경을 다시 |
1069 |
콧등 위로 밀었다. |
1070 |
"아이구, 고맙습니다, 부인." |
1071 |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
1072 |
"정말 고맙습니다. 부인은 저를 지금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서 구출해 주시는 |
1073 |
겁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부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려우시더라도 제 부탁을 |
1074 |
좀 들어주시지요, 시간이 없거든요. 이제 시간이 겨우" |
1075 |
그가 시계를 다시 쳐다보았다. |
1076 |
" 겨우 10분밖에 없답니다. 그러니 지금 즉시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
1077 |
말은 지금 당장, 곧바로 말입니다." |
1078 |
질문 가운데는 어차피 묻는 사람조차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는 |
1079 |
것의 내용에 이미 부정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말을 꺼내자마자 |
1080 |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탁도 있다. |
1081 |
조나단은 토펠 부인의 그늘진 커다란 눈을 쳐다보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고, |
1082 |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이미 그 |
1083 |
전에 허둥대며 질문을 늘어놓을 때 다 알고 있었다. 손목 시계를 쳐다본 순간 혈액 |
1084 |
속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쑥 내려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10분 |
1085 |
남았다니!) 그는 이제 막 물에 녹으려는 무른 얼음 덩어리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
1086 |
몸이 뒤뚱하며 기우는 것 같았다. 10분이라니! 세상에 어느 누가 10분 동안에 그렇게 |
1087 |
괴상하게 찢겨진 구멍을 때울 수가 있겠는가? 그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도저히 |
1088 |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넓적다리에 대고 그대로 꿰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밑에다 |
1089 |
뭐든 대야 하니까 그것은 곧 바지를 벗어야 된다는 의미였다. 봉 마르셰 백화점의 |
1090 |
식료품부 어디에서 갈아입을 바지를 구한단 말인가? 바지를 벗고 그냥 속옷 차림으로 |
1091 |
있는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
1092 |
"지금요?" |
1093 |
토펠 부인이 물었고, 조나단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고, 깊이를 알 수 |
1094 |
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1095 |
토펠 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
1096 |
"이것 좀 보세요, 아저씨. 여기 보시는 이것들 모두다요." |
1097 |
그렇게 말하면서 부인은 쟈켓과 바지와 블라우스 등의 옷가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
1098 |
약 2 미터쯤 되어 보이는 옷걸이를 가르켰다. |
1099 |
"이것들을 내가 지금 당장 다 해야만 한다고요. 하루에 열 시간 동안이나 일하고 |
1100 |
있어요." |
1101 |
"네, 그러시겠지요." |
1102 |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
1103 |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부인.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인 |
1104 |
생각으로는 이 구멍을 기우는데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
1105 |
토펠 부인은 다시 재봉틀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빨간색 치마를 다시 |
1106 |
추스르며 바늘 끝을 내려 치마에 물렸다. |
1107 |
"다음 주 월요일까지 가져오시면 3주 후에 해놓을 수 있어요." |
1108 |
"3주라고요?" |
1109 |
조나단은 넋이 나간 듯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
1110 |
"네, 3주요. 더 빨리는 안 돼요." |
1111 |
그런 다음 부인은 기계를 작동시켰고, 바늘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
1112 |
조나단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없는 듯한 착각을 했다. 불과 팔 하나만 |
1113 |
뻗으면 닿을 만한 곳의 재봉틀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토펠 부인, 진주빛 테를 한 |
1114 |
안경과 밤색의 머리카락, 바쁘게 움직이는 뭉툭한 손가락, 빨간색 치마의 가장자리에 |
1115 |
연신 실을 박아대며 움직이는 바늘을 다 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그 뒤에 |
1116 |
분주한 슈퍼마켓의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자기 자신만은 |
1117 |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깐 동안 자기 스스로를 주변의 한 개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
1118 |
밖에 멀리 떨어져서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처럼 주변을 지켜보고 있는 |
1119 |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전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다시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렸다. 그는 |
1120 |
한 발자국 옆걸음질을 친 다음 방향을 돌려 출구로 빠져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정신이 |
1121 |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고, 망원경을 보는 듯한 현상은 눈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마음 |
1122 |
속은 그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
1123 |
문방구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하나 샀다. 그것을 바지에 붙여서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
1124 |
있는 삼각형의 옷감 깃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펄럭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고 |
1125 |
다시 직장으로 갔다. |
1126 |
오후 내내 그는 걱정과 노여움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행 앞 제일 높은 계단 |
1127 |
위에서 기둥에 바짝 붙어있기는 하였지만, 나약함에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
1128 |
등을 기대지는 않았다. 또 어차피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남의 눈에 잘 |
1129 |
띄지 않게 기대려면 뒷짐을 져야만 했는데, 왼손으로 넓적다리의 스카치 테이프를 |
1130 |
가려야만 했기 때문에 안 됐다. 그 대신 안정된 자세를 취하려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
1131 |
건방진 젊은 녀석들이 했던 대로 양다리를 쩍 벌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서자 |
1132 |
등이 구부러졌고, 언제나 반듯하게 치켜들고 있던 턱이 머리와 모자랑 같이 어깨 |
1133 |
사이로 쑥 들어가는 형상이 되었으며, 그런 자세 때문에 자동적으로 모자챙 아래로 |
1134 |
쳐다보는 시선은 험상궂어 보였고,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다른 경비원들을 보면 |
1135 |
스스로 경멸했던 무뚝뚝한 표정이 돼버렸다. 그는 갑자기 기형이 된 기분이었고, |
1136 |
경비원의 캐리커처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으며, 자기 스스로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
1137 |
느껴졌다. 그런 그가 한심스러웠다. 혐오스러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타는 |
1138 |
증오심으로 껍질을 홀딱 벗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온몸의 살갗이 다시 가렵기 |
1139 |
시작하였고, 땀구멍에는 땀이 맺히고 제2의 피부처럼 옷이 몸에 짝 달라붙었기 때문에 |
1140 |
옷이 몸을 문지를 수도 없어서 그는 정말로 껍질을 홀라당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
1141 |
살갗과 옷 사이에 공기가 조금 통해서 옷이 붙어있지 않은 곳은 다리 아랫부분이나, |
1142 |
팔뚝이나, 등판의 가운데 고랑 윗부분이었다. 그중에서 등판의 고랑에는 땀이 |
1143 |
송글송글 맺혀 땀방울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울 |
1144 |
정도였지만그곳만큼은 절대로 긁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몸 |
1145 |
전체로 느끼는 불편함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못할 거면서, 그를 좀 더 확실하게 |
1146 |
바보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혹시 약간 도움이 될지도 |
1147 |
모를 그 짓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그냥 꾹 참기로 하였다. 오래 참으면 |
1148 |
참을수록 그쪽이 더 나았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증오와 분노는 더 부추겨졌고, 그것은 |
1149 |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몸 속에 피를 돌게 하면서 땀구멍으로 더 많은 땀을 밀어내는 |
1150 |
것으로 그것 나름대로 고통을 배가시켰기 때문에 그의 증오와 분노는 정당화될 수 |
1151 |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흥건히 젖었고, 땀줄기가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렸고, 모자의 |
1152 |
테두리는 부풀어오른 그의 이마를 아프게 조였다. 그래도 그는 아주 잠시 |
1153 |
동안만이라도 절대로 모자를 벗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꽉 닫은 압력솥 뚜껑처럼 쇠로 |
1154 |
만든 고리가 되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머리 위에 그대로 얹혀져 있어야만 될 것 |
1155 |
같았다. 그러다가 혹시 머리가 터지더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을 경감시킬 수 |
1156 |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서 |
1157 |
있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등이 점점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것과, 어깨와 목과 머리가 |
1158 |
더 많이 밑으로 수그러들고 있어서 몸이 땅딸막해지면서 잡종 개 같은 자세로 |
1159 |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
1160 |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그가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
1161 |
없었지만,그의 몸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
1162 |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
1163 |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
1164 |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세상의 실제 모습이 그의 눈 안으로 담겨지지 않았고, |
1165 |
빛의 흐름이 거꾸로 연결된 듯 두 눈은 마음 속에 일그러진 상들을 밖으로 토해내기 |
1166 |
위하여 외부로 통하도록 만들어진 문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때 길 건너편 노천 까페의 |
1167 |
웨이터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까페 앞의 인도에서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빈둥거리며 |
1168 |
돌아 다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나이가 새파랗고, 멍청한 웨이터들이었다. 버릇없는 |
1169 |
잡담이나 지껄이거나, 히죽거리며 웃거나, 낄낄대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훼방하거나, |
1170 |
아가씨들을 향해 휘바람을 불거나, 가끔씩 주문을 받으면 주방 쪽으로 열린 창문에 |
1171 |
대고 '커피 한 잔! 맥주 하나! 레몬수 하나!' 따위나 소리치는 일 말고는 수탉처럼 |
1172 |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든가, 일부러 바쁜 척 |
1173 |
하면서 주문된 음식을 곡예를 하듯이 들고 나와 손님들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또 |
1174 |
주문받은 것을 갖다줄 때는 엉터리 예술가 같은 몸짓으로 찻잔을 나사처럼 빙 |
1175 |
돌리다가 탁자에 놓든가, 콜라병을 넓적다리 사이에 끼우고 한 손으로 뚜껑을 딴 |
1176 |
다음에 그제서야 그때까지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영수증을 빼내어 재떨이 밑에 끼워 |
1177 |
놓는다든가, 그 사이에 다른 손으로는 옆 좌석의 계산을 하곤 하였다. 커피 한 잔에 5 |
1178 |
프랑이나 하고, 맥주 작은 것 한 병에 11 프랑이나 하고, 거기에다가 그 잘난 |
1179 |
서비스에 대한 봉사료를 15 퍼센트나 얹고, 팁까지 받아 엄청나게 많은 돈을 지갑에 |
1180 |
챙겨 넣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팁을 기대하였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
1181 |
팁이나 받아먹는 그들이 굉장히 뻔뻔스러운 작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그것을 |
1182 |
주지 않으면 그들 입에서는 '안녕히 가십시오'는 고사하고 '고맙습니다'라는 인사조차 |
1183 |
나오지 않았다,팁을 주지 않는 손님은 그런 자들의 눈에는 허깨비 같은 |
1184 |
것이어서, 가게를 나설 때 웨이터의 거만한 등짝이나 엉덩짝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
1185 |
그 멍청한 바보들은 돈이 꽉 찬 검은색 지갑을 멋들어져 보인다는 생각으로 마치 살찐 |
1186 |
볼기짝처럼 뻔뻔스럽게 내보이며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조나단은 바람이 잘 통할 것 |
1187 |
같은 시원한 반소매 셔츠 바람의 그 허풍스러운 작자들을 자기의 독기 어린 시선으로 |
1188 |
찔러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예 길 건너편으로 달려가서 그늘진 천막 |
1189 |
속에 있는 그들을 귀를 잡고 대로로 끌고 나와 귀싸대기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한 |
1190 |
대는 귓바퀴 뒤에, 또 한 대는 볼기짝에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바꿔가며 |
1191 |
철썩철썩 갈기고 싶었다. |
1192 |
꼭 그들만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까짓 코흘리개 웨이터의 귀퉁이만 |
1193 |
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손님들도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었다. 한심한 관광객으로 |
1194 |
보이는 손님들은, 바로 코앞에서 어떤 사람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고 있는데 여름 |
1195 |
남방에 밀짚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어기적거리면서,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청량 |
1196 |
음료나 홀짝대고 있는 작자들이었다. 자동차를 몰고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
1197 |
공기를 더럽히고, 듣기 거북한 소음이나 유발하고, 지독한 냄새로 찌든 양철통 속에나 |
1198 |
들어앉아서 날씨도 화창한 긴 하루를 세브르 가를 난폭하게 왔다갔다하며 질주하는 짓 |
1199 |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원숭이 같은 작자들이었다. '이미 있는 냄새만으로도 |
1200 |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 이 거리, 이 도시에서 나는 소음만도 너무 시끄럽지 않다는 |
1201 |
건가? 하늘에서 내리쬐는 작열하는 뙤약볕도 부족하다는 건가? 숨쉴 수 있을 만한 |
1202 |
것으로는 겨우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은 공기를 엔진 속으로 빨아들여 태워가지고 |
1203 |
독성과 매연과 뜨거운 증기로 섞어 멀쩡한 사람의 콧속으로 불어넣어야 속이 시원하단 |
1204 |
말인가? 쓰레기 같은 놈들! 범법자들! 그런 놈들은 씨를 말려버려야 해. 총으로 쏴 |
1205 |
죽이던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쏜 다음에 다시 전체를 다 쏴버려야 해.' |
1206 |
조나단은 권총을 꺼내 어디로든지 한방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다방의 |
1207 |
한가운데를 향하여 쏘든가, 요란하게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도록 유리창 한 |
1208 |
가운데를 향하여 쏘든가, 자동차의 무리 속을 향하여 쏘든가, 길 건너에 있는 보기 |
1209 |
싫게 높고 위협적인 큰 건물 가운데 하나를 향하여 쏘든가, 아니면 그냥 허공에 대고 |
1210 |
위쪽으로 쏘든가, 혹은 하늘을 향해, 정말 그 뜨겁고 지겹게 짓눌러서 숨막힐 것 같은 |
1211 |
비둘기빛 청회색의 하늘을 향해 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
1212 |
부서져서 납처럼 무거운 캡슐 같은 세상을 부서뜨리고, 붕괴하고, 추락하여 저 |
1213 |
흉칙스럽고, 지겹고, 시끄럽고, 악취나는 모든 것들을 다 으스러뜨려 묻어버릴 수 있게 |
1214 |
하고 싶었다. 바지에 생긴 구멍 때문에 비롯된 조나단의 분노는 결국 온 세상을 |
1215 |
산산조각 내고, 재로 만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게 무한하고 무진장해졌다. 그렇지만 |
1216 |
그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늘로나, 길 건너편의 |
1217 |
까페로나, 지나가는 자동차의 무리에 총을 쏘지 않았다. 그대로 선 채 땀을 흘리며 |
1218 |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불타오르게 하였고, 눈을 통하여 |
1219 |
뿜어나오게 하였던 바로 그 증오의 힘이 이제는 다시 세상을 등진 듯 그를 완전히 |
1220 |
마비시켰다. 손을 무기가 있는 곳까지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손가락을 방아쇠에 대고 |
1221 |
구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한 마디 관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는 짓궂게 코 |
1222 |
끝에 맺혀 있는 작은 땀방울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약간 흔들 힘조차도 없었다. 그 |
1223 |
힘이 그를 그렇게 돌처럼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를 정말로 스핑크스 같이 |
1224 |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였고, 또한 요지부동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마치 그것은 철 |
1225 |
속에 자석의 힘을 통하게 하거나, 철을 일정하게 흔들거리도록 만드는 전압 같은 |
1226 |
것이었고, 혹은 돔 같은 건물의 둥근 천정에 있는 벽돌 하나하나마다 특정한 곳에 꼭 |
1227 |
붙어 있게 만드는 강력한 압력 같은 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 |
1228 |
속에만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 모든 것의 잠재성은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
1229 |
진정으로 해보고 싶다'라는 가정에 묶여 있을 뿐이고, 조나단은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
1230 |
잡다하게 끔찍한 생각들을 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절대로 할 수 |
1231 |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럴 인간이 못 되었다. 정신적인 곤궁함과 |
1232 |
혼란스러움과 혹은 순간적인 증오로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정신 착란자는 아니었다. |
1233 |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
1234 |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
1235 |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
1236 |
오후 다섯 시경에 그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고, 은행 |
1237 |
입구의 세 번째 계단에 있는 기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만 |
1238 |
같았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된 밖으로부터의 태양열과 안으로부터의 뜨거운 분노의 |
1239 |
충돌로 온몸이 녹고, 사그라져서 적어도 20 년은 더 늙은 것 같았고, 키도 |
1240 |
20센티미터는 줄어든 것 같았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가는 것을 더 이상 느끼지도 |
1241 |
못하게 되어서 그는 정말로 몸이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5천년의 세월을 보낸 석제 |
1242 |
스핑크스처럼 사그라지고, 피폐해지고, 열에 찌들고, 부서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
1243 |
세월이 얼마 흐르지않아 완전히 말라 비틀어지고, 전소하고, 오그라들고, 부서져서 |
1244 |
마치 먼지나 재처럼 가루가 되어, 거기 그가 그렇게 힘겹게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
1245 |
한 무더기 쓰레기로 소복이 떨어져 있다가,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거나, 청소부가 |
1246 |
비질을 하거나, 비라도 오면 그제서야 마침내 그곳에서 멀리 날아가버리게 되리라는 |
1247 |
상상이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마감될 것 같았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
1248 |
연금을 받고 사는 평범한 노인네가 되어 자기 집의 자기 침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
1249 |
거기 그 자리에 한 무더기 쓰레기로 말이다! 그는 이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 주기를 |
1250 |
간절히 바랬다. 붕괴의 과정이 좀더 빨리 가속화하여 그만 끝나주었으면 하는 |
1251 |
바람이었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무릎이 꺽이면서 고꾸라져주기를 진실로 바랬다. 그는 |
1252 |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며 애를 썼다.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
1253 |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원하는 때는 언제라도 울 수 있었다. 숨도 기절할 때까지 안 쉴 |
1254 |
수도 있었다. 혹은 심장 박동을 잠시 멈출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할 |
1255 |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참말이지 주저앉고 |
1256 |
싶어도 무릎조차 구부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역겨운 것을 |
1257 |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
1258 |
그때 뢰델 씨 승용차에서 나는 엔진소리가 나즈막하게 들렸다. 경적 소리가 아니라 |
1259 |
방금 전에 시동을 걸고 뒷마당에서 정문 쪽으로 나오려고 할 때 나는 엔진이 돌며 |
1260 |
내는 작은 쇳소리였다. 그 작은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귓속을 파고 들어와, 전기가 |
1261 |
들어오는 것처럼 그의 몸에 있는 온 신경에 비상을 걸고 있음을 조나단은 몸의 관절이 |
1262 |
뚝뚝 꺽이는 것과 척추가 기지개를 펴는 것으로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어떻게 |
1263 |
하지도 않았는데 벌리고 서 있던 오른발이 왼발 쪽으로 옮겨가고, 왼발이 구두 |
1264 |
뒷꿈치를 중심으로 돌고, 오른쪽 무릎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구부러지고, 왼쪽도 |
1265 |
똑같이하고, 다시 오른쪽발이. 한 발씩, 한 발씩 발을 내딛고, 실제적으로 걷고, |
1266 |
세 개의 층계를 뛰어내려 가고, 벽을 따라가면서 정문 쪽으로 허둥지둥 뛰어가고, |
1267 |
정문을 밀어젖히고, 부동 자세를 취하고, 오른쪽 손을 절도있게 모자챙에 붙이고, |
1268 |
승용차를 통과하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는 전혀 |
1269 |
개입시키지 않고 완전히 자동적으로 했다. 그의 자각은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
1270 |
뭔가를 했다는 동작만을 인식하는 것 뿐이었다. 행동을 취하면서 조나단이 생각과 |
1271 |
함께 했던 유일한 부분은 뢰델 씨의 승용차가 지나간 후 쓰디쓴 분노의 눈길을 그것을 |
1272 |
향하여 보낸 것과 한참 동안이나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 전부였다. |
1273 |
그러나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는 그 마지막 남은 불씨 같은 분노의 불길도 |
1274 |
사라져버렸다. 기계적으로 세 개의 계단을 오를 때 증오의 마지막 찌꺼기도 다 |
1275 |
말라버렸고, 그 위에 다 올라갔을 때 그는 눈으로 아무런 독기나 분노도 뿜어내지 |
1276 |
않았으며, 다만 힘없는 시선을 거리에 떨굴 뿐이었다. 눈이 자기 것으로 생각되지 |
1277 |
않았고, 자기가 그 눈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생명이 없는 둥근 유리창을 |
1278 |
통해 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몸뚱어리도 전부 자기 것이 아닌 |
1279 |
것 같았고, 조나단 자신이나 적어도 자기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낯선 사람의 |
1280 |
커다란 육신에 쬐끄맣게 찌그러져 붙어 있는 정령처럼 느껴졌다. 자기 힘으로는 |
1281 |
조절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로는 방향을 틀 수도 없으며, 필요하다면 저절로 |
1282 |
움직이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힘의 지배를 받는 거대한 인간 기계가 있는 누군가의 |
1283 |
커다란 몸 속에 갇혀버린 딱한 정령 같았던 것이다. 스핑크스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은 |
1284 |
것이 아니라, 작동이 멈춰졌거나, 줄이 끊겨진 꼭두각시처럼 기둥 앞에 가만히 서서 |
1285 |
마지막 남은 10분의 근무 시간을 채웠고, 정각 오후 5시 30분에 빌망 씨가 잠깐 바깥 |
1286 |
유리창에 모습을 드러내며 문닫자고 소리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조나단 |
1287 |
노엘이라고 불리우는 꼭두각시 인간 기계는 은행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 문의 |
1288 |
여닫이를 조절하는 책상으로 가서, 직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쪽과 바깥쪽 |
1289 |
유리문을 두 개의 버튼을 누르며 조절하였다. 그런 다음 먼저 로크 부인이 빌망씨와 |
1290 |
함께 잠궈둔 금고로 통하는 문을 로크 부인과 함께 잠궜다. 그리고는 빌망 씨와 함께 |
1291 |
비상 경보기를 작동시켰고, 전자식 문 개폐기도 끄고, 로크 부인과 빌망 씨와 함께 |
1292 |
은행 문을 나섰으며, 빌망 씨가 안쪽 유리문을 열쇠로 채우고, 로크 부인이 바깥 |
1293 |
유리문을 잠그고 난 다음 규정대로 셔터를 내리고 잠궜다. 밖으로 나와서 로크 부인과 |
1294 |
빌망 씨를 향하여 등을 약간 굽히며 인사를 했고, 그 두 사람에게 좋은 저녁 시간이 |
1295 |
되라는 말과 주말을 잘 보내라는 인사도 했으며, 좋은 주말을 보내라는 빌망 씨의 |
1296 |
인사와 월요일에 보자는 로크 부인의 말도 감사하게 받았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이 |
1297 |
먼저 몇 발자국을 걸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도 밀려오는 행인들의 물결에 |
1298 |
합류하였고, 사람들과 반대 방향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보행은 마음을 달래줬다. |
1299 |
걷는 것에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발을 하나씩 |
1300 |
떼어놓고, 그와 동시에 팔을 리듬에 맞춰 휘젓고, 숨이 약간 가빠오고, 맥박도 조금 |
1301 |
긴장하고, 방향을 결정할 때와 중심을 잡는 데 필요한 눈과 귀를 사용하고, 살갗에 |
1302 |
스치는 바람의 감각을 느끼고그런 모든 것들이 설령 영혼이 형편없이 위축되고 |
1303 |
손상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크고 넓게 만들어주어서,마침내 정신과 |
1304 |
육체가 모순 없이 서로 조화롭게 되는 일련의 현상들이었다. |
1305 |
그런 현상이 굉장히 큰 육체 인형 속에 파묻혀 있는 정령인 제2의 조나단에게서도 |
1306 |
일어났다.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발걸음을 하나씩하나씩 떼어놓을수록 몸이 점점 |
1307 |
커져갔고, 내면도 채워져갔으며, 자기 스스로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상태로 급격하게 |
1308 |
변화해 가더니 마침내는 조나단 자신과 일체가 되었다. 바크 가의 모퉁이쯤에 |
1309 |
다다랐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곧 바로 바크 가를 가로질렀다. (꼭두각시 |
1310 |
조나단이었다면 자동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꺽고, 분명히 늘 다니던 길인 플랑슈 |
1311 |
가로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묵게 될 호텔이 있는 성 플라시드 가를 |
1312 |
왼쪽에 두고, 라베 그레구아르 가까지 쭉 걷다가 계속해서 보지라르 가까지 간 다음 |
1313 |
뤽상브르 공원 쪽으로 갔다. 공원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조깅할 때 뛰는 길인 제일 |
1314 |
바깥쪽 원을, 울타리의 나무들을 따라 세 번 돌았다. 그리고는 방향을 남쪽으로 |
1315 |
바꾸고, 몽파르나스 가로 가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를 찾았고, 거기에서 다시 묘지 |
1316 |
주의를 한 바퀴, 두 바퀴 돌았고, 다시 서쪽으로 가서 제15구를 향했다. 제15구를 |
1317 |
가로질러 세느 강까지 갔다가, 북동향의 제7구를 향해 올라갔고, 다시 제6구로 |
1318 |
갔으며여름철 낮은 긴 법이니까,또 계속해서 쉬지도 않고 걷다가 |
1319 |
뤽상브르 공원으로 다시 갔다. 공원에 다다랐을 때 공원문은 이미 조금 전부터 닫혀져 |
1320 |
있었다. 그는 참의원 건물 옆에 있는 공원 대형 철제문 앞에 잠시 섰다. 시간이 9시는 |
1321 |
되었을 것 같았는데도 밖은 아직 낮처럼 환했다. 엷게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불 빛과 |
1322 |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그림자의 테두리만이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
1323 |
보지라르 가에는 차량도 줄어들어 거의 뜸해졌다. 수많던 인파도 줄었다. 공원 출구나 |
1324 |
길 모퉁이에 군데군데 모여 있던 사람들도 이내 흩어져서 한 사람씩 오데옹 극장과 성 |
1325 |
쉴피스 성당 주변의 숱한 골목길로 사라져갔다. 한잔 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
1326 |
공기는 부드러웠고, 옅은 꽃내음이 묻어났다. 적막했다. 파리 전체가 저녁을 맞고 |
1327 |
있었다. |
1328 |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여러 시간 동안 걸어다녀서 다리와 등과 어깨가 아파왔고, |
1329 |
신발 속 발바닥은 불붙는 것 같았다. 허기도 갑자기 몰려와서 배가 뒤틀렸다. 스프와 |
1330 |
흰 식빵과 고기 한 점이 먹고 싶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까네뜨 가에 |
1331 |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봉사료를 포함해서 47 프랑 50 만 내면 되는 |
1332 |
정식을 비롯해서 갖가지 음식이 다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땀에 절어 악취를 풍기고, |
1333 |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는 처지로는 갈 수 없었다. |
1334 |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추스렸다. 가는 도중 아싸 가에서 튀니지 사람이 하는 |
1335 |
잡화상을 보았다. 문이 아직 열려 있었다. 기름에 절인 정어리 통조림 하나, 염소 |
1336 |
젖으로 만든 치즈 한 덩이, 배 하나, 포도주 한 병과 아랍 식빵을 하나 샀다. |
1337 |
호텔 방은 플랑슈 가에 있는 그의 방보다도 작았다. 한쪽 면이 출입문보다 약간 더 |
1338 |
길었다. 기껏해야 3 미터밖에 안 될 것 같았다. 벽들은 서로 직각을 이루며 맞물려 |
1339 |
있지도 않았고문쪽에서 보자면,폭이 2 미터쯤 되어 보이는 곳까지 |
1340 |
비스듬히 벌어지다가, 갑자기 좁아지면서 방의 전면에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며 서로 |
1341 |
붙어 있었다. 방의 모양새가 말하자면 관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관보다 훨씬 |
1342 |
더 넓지도 않았다. 긴 벽 쪽에 침대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세면대가 설치되어 |
1343 |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안에서 밖으로 돌리며 끄집어낼 수 있게 만들어진 뒷물 대야가 |
1344 |
하나 있었고,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세면대의 오른쪽 |
1345 |
위로는 천정 바로 밑으로 창문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것은 창문이라기보다는 두 |
1346 |
가닥의 끈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든 유리가 끼워진 작은 채광구라고 하는 것이 |
1347 |
옳았다. 습하고 후끈한 미풍이 밖에서 나는 잡다한 소음을 그 구멍을 통해 관 속으로 |
1348 |
실어날랐다.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화장실에서 물을 트는 소리, 스페인 어와 포르투칼 |
1349 |
어의 토막 단어들, 약간의 웃음소리, 어린애가 훌쩍거리는 소리 그리고 가끔은 아주 |
1350 |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 |
1351 |
조나단은 속옷 바람으로 침대가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을 먹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
1352 |
그 위에 가방을 얹은 다음, 사온 물건 봉지를 펼쳐놓아 식탁 대용으로 썼다. 쬐끄만 |
1353 |
정어리를 주머니칼로 가로로 잘라 반쪽을 찍어 빵조각에 얹어서 한 입에 먹었다. |
1354 |
물컹물컹하고 기름에 절은 생선 살이 싱거운 빵과 함께 뒤섞이며 기막히게 맛 좋은 |
1355 |
덩어리가 되었다. 레몬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맛이 더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
1356 |
하였지만.(한 입 먹고 나서 포도주를 병째로 들어 조금 마신 후 그것을 이 사이로 |
1357 |
지긋이 물면서 잠깐 물고 있으면 생선의 진한 뒷맛이 포도주의 약간 신 듯한 향료와 |
1358 |
어우러지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맛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은 |
1359 |
아니었다.) 조나단은 식사를 하고 있는 그 순간보다 더 맛있게 음식을 먹어 보았던 |
1360 |
적이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을 것 같았다. 통조림 통에 정어리가 네 개 들어 |
1361 |
있었으므로 그런 맛을 여덟 번 맛볼 수 있었다. 빵과 함께 그것을 온 신경을 집중하여 |
1362 |
씹어먹었고, 포도주도 여덟 번 마셨다. 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
1363 |
배가 많이 고플 때 음식을 빨리 먹으면 몸에 좋지 않고 소화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
1364 |
것을 읽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먹는 또 다른 이유는 |
1365 |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1366 |
정어리를 다 먹고, 깡통에 남아 있던 기름도 빵으로 훑어서 다 먹은 다음 치즈와 |
1367 |
배를 먹었다. 배는 어찌나 수분이 많던지 껍질을 깍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
1368 |
그리고 치즈는 빈틈없이 단단히 뭉쳐져 있어서 칼날에 자꾸만 늘어붙었고, 맛이 |
1369 |
어찌나 시면서 쓰던지 잇몸이 순간적으로 아찔했으며, 잠깐 동안 침샘이 말라버려 |
1370 |
입이 건조해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달콤하고 물이 많은 배를 한 조각 먹으면 다시 |
1371 |
괜찮아지면서 이와 입천정에서 떨어져 서로 엉키다가 혀를 타고 목 속으로 쏙 |
1372 |
들어가곤 하였다. 다시 치즈 한 입 먹고, 한 번 살짝 놀라고, 또 다시 그것을 |
1373 |
부드럽게 섞어주는 배를 한 조각 먹고, 치즈 먹고, 또 배 먹고. 맛이 너무나 |
1374 |
좋아서 그는 치즈를 쌌던 종이를 칼로 박박 긁었고, 조금 전에 칼로 썰어냈던 배의 |
1375 |
가운데 부분도 갉아먹었다. |
1376 |
한동안 몽롱하게 앉아 혓바닥으로 이를 훑다가 마지막 남은 빵 조각과 포도주를 |
1377 |
삼켰다. 그런 다음 빈 깡통과 배 껍질과 치즈를 쌌던 종이를 빵 부스러기와 함께 돌돌 |
1378 |
말아서 봉지에 넣어 치웠고, 쓰레기 봉지와 빈 병을 문가에 세워둔 다음, 가방을 |
1379 |
의자에서 내려놓고, 의자를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은 후, 손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
1380 |
그는 담요를 발치까지 밀어놓고, 홑이불만 덮었다. 그리고는 불을 껐다. 칠흑 같은 |
1381 |
어둠이었다. 위쪽 천장 근처의 구멍에서조차 한 줄기 가느다란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
1382 |
다만 물기 찬 미풍과 멀리, 아주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만이 그 사이로 들어올 |
1383 |
뿐이었다. 몹시 후덥지근했다. |
1384 |
"내일 자살해야지." |
1385 |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
1386 |
그날 밤 악천후가 있었다. 곧 바로 이어가며 천둥 번개를 몰아치는 그런 것이 |
1387 |
아니라 뜸을 한참씩 들이면서 힘을 오랫동안 질질 끄는 악천후였다. 두 시간 동안 |
1388 |
하늘이 잔뜩 찌푸러지기만 하면서 살짝 번갯불을 비취다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조금 |
1389 |
내보기도 하다가, 어디에서 한바탕 터지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양 도시의 |
1390 |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면서 세력을 점점 키우고, 더 넓게 퍼지더니 도시 전체를 얇은 |
1391 |
납 같은 덮개로 씌워놓았고, 다시 또 기다리다가 그런 망설임으로 인한 팽팽한 |
1392 |
긴장감이 감돌아도 여전히 폭발해 버리지 않았다. 덮개 아래로는 아무것도 |
1393 |
움직이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대기에 아주 미세한 바람도 일지 않았고, 이파리 하나, |
1394 |
티끌 하나 꼼짝하지 않았고, 도시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굳어 |
1395 |
있는 속에서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도시 자체가 뇌우가 되어 하늘이 |
1396 |
터져버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비된 긴장감 속에서 떨고 있는 듯 했다. |
1397 |
그러다가 마침내, 이미 아침이 조금씩 밝아오려고 할 무렵 딱 한 번 요란하게 |
1398 |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얼마나 컸던지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리는 것 |
1399 |
같았다. 조나단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깨어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던 것도 |
1400 |
아니고, 그것이 천둥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들었기 때문에 더 안 좋았다. 눈을 뜨는 |
1401 |
순간 '꽝!' 하는 소리는 끔찍스러운 공포로 그의 관절 마디마디에 부서졌고, 미처 |
1402 |
원인을 알지 못하던 그에게 그것은 죽음의 공포로 느껴지는 경악스러움이었다. 단지 |
1403 |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여러 갈래의 천둥소리로 다양한 반향을 내는 그 |
1404 |
소리의 여운 뿐이었다. 그는 밖에서 마치 책장처럼 집들이 차례로 넘어지고 있는 듯한 |
1405 |
소리를 들었고, 그때 그에게 떠오르던 첫 번째 생각은 '이제 이쯤에서 모든 것이 |
1406 |
끝나는구나'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종말이 아니라, 지진이나 |
1407 |
핵 폭탄 혹은 그 둘 다 일어나거나 떨어져서, 어쨌든 완벽한 끝을 말하는 세상의 종말, |
1408 |
혹은 세상의 멸망의 때가 왔다고 믿는 것이었다. |
1409 |
그러나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두들겨대던 소리도, 넘어지는 소리도, 꺽어지는 |
1410 |
소리도, 메아리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나타나 지속되는 |
1411 |
침묵은 세상이 망하는 듯이 울려대던 굉음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그것은 조나단에게 |
1412 |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자신 이외의 것은 위든, 아래든, 반대편이든, 밖이든 방향을 |
1413 |
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몽땅 없어진 것으로 느껴졌다. 시각과 청각과 균형 감각 등의 |
1414 |
지각이 살아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런 |
1415 |
것들은 캄캄한 어둠과 침묵속으로 다 없어져버린 듯 했다. 그는 다만 마구 곤두박질 |
1416 |
치고 있는 심장과 온몸이 부들들 떨리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자기가 침대에 있다는 |
1417 |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지않다는 전제를 |
1418 |
한다면 누구의 침대고,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흔들거리는 것 |
1419 |
같아서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유일한 것을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넘어지지 |
1420 |
않으려고 양손으로 매트리스를 꽉 움켜잡았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든지 잡을 수 있을 |
1421 |
만한 것을 찾았고, 고요 속에서 무슨 소리든지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
1422 |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무했다. 그때 뱃속이 꿈틀거리더니 역겨운 정어리 |
1423 |
냄새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절대로 토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
1424 |
자기마저 속을 비워내 자신을 오물로 더럽히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 |
1425 |
같았다. 그러다가 소름이 끼치도록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오른쪽 위에서 아주 |
1426 |
희미한 빛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에 눈길을 붙들어 매었다. 사각형의 |
1427 |
작은 곳에 빛을 담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가름하는 구멍 같기도 하고, 방에 뚫린 |
1428 |
창문 같기도 한 것이 보였다. 도대체 누구의 방이란 말인가? 그곳은 분명 그의 |
1429 |
방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그런 방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의 방에는 창문이 |
1430 |
침대 발치 쪽에 있고, 천장에 닿을 만큼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친척 |
1431 |
아저씨네 집에서 살았던 방도 아니고, 샤렝통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 있던 |
1432 |
방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어렸을 때 쓰던 방이 아니라 지하실, 정말 부모님이 살던 |
1433 |
집의 지하실 같았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
1434 |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
1435 |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
1436 |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
1437 |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
1438 |
없단 말이야!' |
1439 |
그가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참이었다. 남들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것이 애늙은이 |
1440 |
조나단 노엘에게 너무나 다급하고, 무섭고, 절망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
1441 |
살 수 없다는 말을 침묵 속으로 크게 내뱉으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
1442 |
소리치려고 할 때 대답이 들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이다. |
1443 |
처음에는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다가 다시 두드리는 |
1444 |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위쪽 어디에선가 세 번째, 네 번째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
1445 |
그러더니 그 소리는 규칙적으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가 되더니 점점 |
1446 |
더 요란해졌고, 마침내는 더 이상 북소리가 아니라 힘차게 좍좍 쏟아지는 소리가 |
1447 |
되었다. 조나단은 그 소리가 빗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
1448 |
방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연한빛으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얼룩도 |
1449 |
채광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 호텔 방의 윤곽도 잡을 수 있게 |
1450 |
되었다. 세면대도, 의자도, 가방도, 벽도 다 보였다. |
1451 |
매트리스를 꽉 움켜잡고 있던 손을 풀었고, 다리를 가슴에 닿게 오무린 다음 팔로 |
1452 |
둥글게 감싸안았다. 그렇게 잔뜩 웅크린 자세로 오랫동안, 아마 약 30분 정도는 족히 |
1453 |
될 시간을 가만히 있으면서 좍좍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
1454 |
그리고는 일어서서 옷을 입었다. 희끄무레한 불빛으로도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었기 |
1455 |
때문에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가방과 외투와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서서 가만 가만히 |
1456 |
층계를 내려갔다. 프런트의 직원은 잠들어 있었다. 조나단은 까치발로 그의 옆을 지나, |
1457 |
그를 깨우지 않으려는 생각에 출입문의 손잡이를 살그머니 돌렸다. '찰칵!'하는 작은 |
1458 |
소리가 났고, 문이 열렸다. 그는 자유 속으로 걸어나갔다. |
1459 |
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청회색의 아침 햇살이 그를 맞았다. 비는 이제 더 이상 |
1460 |
내리지 않았다. 빗물이 처마 끝과 차양에서만 방울방울 떨어졌고, 보도에는 군데군데 |
1461 |
물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조나단은 세브르 가를 향해 내려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
1462 |
한 사람도 없었고, 차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들은 차분하게, 거의 감동적일만큼 청순한 |
1463 |
모습으로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의 거만한 위용과 허풍스러움과 |
1464 |
위협적인 태도를 빗줄기로 씻어내린 것처럼 보였다. 길 건너편 봉 마르셰 백화점의 |
1465 |
식료품부 앞에 고양이가 한 마리 쇼윈도우를 따라가더니 말끔히 청소해 둔 야채 |
1466 |
판매대 밑으로 도망쳤다. 오른쪽 부시코 공원에는 나무들이 비에 젖어 바스락거렸다. |
1467 |
한 쌍의 지빠귀새가 지저귀기 시작했고, 그 새소리가 길가의 건물에 부딪쳐 메아리를 |
1468 |
치면서 도시에 깔려 있던 고요가 더 깊어져갔다. |
1469 |
조나단은 세브르 가를 가로질렀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 바크 가로 접어들었다. |
1470 |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신발이 물에 젖은 아스팔트와 부딪치며 철벅철벅 소리를 |
1471 |
냈다. 꼭 맨발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신발과 양말 속에서 미끄덩거리는 발의 촉감 |
1472 |
때문이 아니라 소리 때문에 그랬다. 신발과 양말을 훌렁 벗어버리고 맨발로 가고 싶은 |
1473 |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막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썽사나울 |
1474 |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기에는 게을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
1475 |
빗물 웅덩이의 한가운데를 밟으며 이 웅덩이에서 저 웅덩이를 찾아 지그재그로 옮기며 |
1476 |
열심히 철벅거렸다. 그리고 한 번은 건너편에 있는 물이 많고 제법 넓은 웅덩이를 |
1477 |
보고 아^예 그쪽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는 젖은 신발을 반듯하게 해서 가차없이 |
1478 |
철벅거렸고, 물이 한쪽은 가게의 쇼윈도우 쪽으로 또 한쪽은 주차된 자동차 쪽으로 |
1479 |
튀어갔으며, 입고 있던 바지 가랭이 쪽으로도 튀었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
1480 |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
1481 |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져 있는 로카르 부인의 |
1482 |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뒷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
1483 |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
1484 |
그 위까지 다 와서 7층에 가까워져서야 층계 끄트머리의 일이 염려스러워졌다. 그 |
1485 |
위에 흉물스러운 비둘기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똥과 바람에 |
1486 |
하늘거리는 작은 깃털에 둘러싸인 채, 빨갛고 갈퀴 발톱처럼 구부러진 발로 복도 끝에 |
1487 |
앉아 있을 비둘기가 그 공포스러운 멀건 눈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날개를 |
1488 |
펄럭거리고 먼지를 흩날리면서 그를 향해 날아오면 그 좁은 복도에서 그것을 피할 |
1489 |
도리가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
1490 |
계단이 불과 다섯 개 남았지만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쉬었다. 돌아서고 싶지는 |
1491 |
않았다. 그 마지막 몇 걸음을 떼어놓기 전에 아주 잠깐만 쉬면서 숨 좀 돌리고, 심장도 |
1492 |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싶었다. |
1493 |
뒤를 돌아다 보았다. 시선이 나선형으로 꼬인 난간을 따라 깊숙히 밑으로 떨어졌다. |
1494 |
각층마다 사선으로 비취는 햇살이 보였다. 아침 햇살은 그 사이 푸른색을 잃고 |
1495 |
노란색으로 변하여 더 따스해진 것 같았다. 아래층 세대들이 있는 곳에서 일찍 깬 |
1496 |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 문이 닫히는 둔한 소리, |
1497 |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 음악소리. 그리고 그에게 아주 친숙한 냄새가 갑자기 코를 |
1498 |
찔러왔다. 라살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자 마치 직접 |
1499 |
커피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공포가 |
1500 |
사라져버렸다. |
1501 |
복도에 다다랐을 때 두 가지가 눈에 얼른 띄었다. 닫혀져 있는 창문과 공동 변소 |
1502 |
옆의 대야 위에 말리려고 펼쳐놓은 걸레였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
1503 |
강해서 시야가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는 미처 복도 끝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어느 |
1504 |
정도 진정된 마음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지나갔고, 그 뒤의 그늘진 곳으로 계속해서 |
1505 |
걸어들어갔다. 복도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비둘기는 온데간데 흔적이 없었다. 바닥의 |
1506 |
오물도 다 치워져 있었다. 깃털도 없었다. 붉은색 타일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
1507 |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
1508 |
(추천의 글) |
1509 |
* 탁월한 심리 분석을 밀도 있는 필치를 통해 소설로 완성시킨 이 시대의 독보적인 |
1510 |
문학 작품 |
1511 |
"라인 메르쿠어" |
1512 |
* 인간에 대한 아주 세밀한 필치로 이미 고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쥐스킨트의 |
1513 |
밀도 높은 작품 |
1514 |
"아벤트짜이퉁" |
1515 |
* 쥐스킨트가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느끼거나 보거나 들을 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1516 |
허무하고 빈한한 인생에서 느끼는 복잡한 내면의 세계를 탁월한 묘사기법을 통해 |
1517 |
그려내고 있다. |
1518 |
"타게스 안짜이거" |
1519 |
(책을 옮기고 나서) |
1520 |
소유란 무엇인가? |
1521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
1522 |
왜 그토록 소유를 위해 온갖 정성을 바치는가? 때로 용의 주도하고, 때로 견고해 |
1523 |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의 계획들은 한낱 사소한 것으로 인해 무참히 붕괴되어버릴 수 |
1524 |
있는 위험을 얼마나 많이 안고 있는가? 소유하기 위해서, 또 소유한 것을 지키기 |
1525 |
위해서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딛는 (삶)이라는 이름의 우리네 고투는 얼마나 단단한 |
1526 |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벽돌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쌓아올리둣 조심하며 삶을 |
1527 |
가꾸어나가는 자의 불안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
1528 |
'비둘기'의 주인공 조나단 노엘은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
1529 |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전형적인 모델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어디에선가 본 |
1530 |
듯한 느낌을 주고, 가까이에 그런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심증을 갖게 하고, |
1531 |
때로는 책을 읽는 사람 자신이 언젠가 느껴봤음직한 생각들을 작가는 그를 통해 |
1532 |
표현했다. 그것도 특수 미세 현미경을 통하여 치밀하게 관찰한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
1533 |
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씩 정교하게 풀어냈다. |
1534 |
그리고 난,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가로서 그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가 갖고 |
1535 |
있는 생각의 흐름을 쫓았다. 그의 작품 '좀머 씨 이야기'와 '콘트라베이스'를 번역하며 |
1536 |
이미 들어가 보았던 그의 마음의 행로에서 난 다시 한 번 색다른 많은 것을 보았다. |
1537 |
그것들을 원래의 상태대로 그대로 원고지에 토해 놓는 것이 말하자면 내 |
1538 |
작업이었다. 굳은 것은 굳은 대로, 사그러지기 쉬운 것은 사그러지기 쉬은 대로, 익은 |
1539 |
것은 익은 대로, 덜 익은 것은 또 덜익은 대로. 정직한 심부름꾼이 되어 덜함도 더함도 |
1540 |
없이 작가의 마음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그대로 옮겨다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
1541 |
쟁취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는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
1542 |
이루어내려고 노력하는 마음 그 자체가 노력을 기울인 사람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
1543 |
몫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유리 상자 안에 갖혀 있는 사람을 그린 것 같은 인위적인 |
1544 |
구도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선을 분명히 그어놓음으로써 보다 |
1545 |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작가의 뜻이 아니었을까 헤아려본다. 어쨌든 책의 |
1546 |
내용이나 느낌에 대해서는 내가 해놓은 작업을 통해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만나게 된 |
1547 |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단지 조금 먼저 읽은 |
1548 |
사람으로서 책 읽는 재미를 조금이라도 앗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1549 |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남의 마음 속에 깊숙히 들어갔다 나와야 되는 작업이라서 |
1550 |
창작보다 오히려 더 힘든 산고를 겪고 다시 또 한권의 책을 내놓게 되어 기쁘다. |
1551 |
이 기쁨을 사랑하는 남편, 아들 성표 그리고 딸 성우와 함께 나누어 갖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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