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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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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ноября 2015 в 17:34 (текущая версия от 8 ноября 2015 в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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Фраз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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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одержание:
1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던 비둘기 사건이 터졌을 때 조나단
2 노엘은 이미 나이 오십을 넘겼고,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3 세월을 뒤돌아보며 이제는 죽음이 아니고는 그 어떤 심각한 일도 결코 일어날 수가
4 없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 그의 믿음에는 충분한 일리가 있었다.
5 그는 도대체 사건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을 못마땅해 했고, 내적인 균형을
6 깨뜨리거나 외적인 일상의 질서를 마구 뒤섞어 놓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혐오하기까지
7 했다.
8 그런 사건들 대부분은 다행스럽게도 세월의 먼지가 수북이 쌓인 유년기나 청년기에
9 일어났으며, 그는 가능하면 그때의 일들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였고, 어쩌다
10 피치 못하게 기억을 더듬어야만 할 때도 몹시 언짢아 하며 마지못해 하곤
11 하였다 샤렝통에서 살았을 때, 1942 년 7월쯤이었다고 생각되는 어느 여름 날
12 오후 낚시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다가
13 천둥 번개가 치더니 소나기가 한바탕 내린 날이었다. 그는 후끈한 열기와 빗물에 젖어
14 있던 아스팔트 위를 신발을 벗고 신나게 물웅덩이 속을 첨벙거리며 맨발로
15 걸었다. 낚시를 갔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당연히 어머니가 부엌에서
16 음식을 만들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부엌으로 곧장 갔으나, 어머니는 온데간데없고,
17 의자의 등걸이에 덩그머니 걸려 있는 앞치마만 눈에 뛸 뿐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18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노라고 했다.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어머니를 아주 먼
19 곳으로 끌고 갔노라고 했다. 처음에는 벨로드롬 디베로 갔다가, 그곳보다 더 먼
20 드란시의 수용소로 갔다가, 거기에서부터 동쪽으로 다시 계속 갔는데 그쪽으로 간
21 사람은 아직 아무도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였다. 조나단은 그 사건을 도대체 하나도
22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그것은 그를 대단한 혼란 속에 빠뜨려놓았다. 그리고 며칠 후
23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후 조나단과 어린 누이동생은
24 얼떨결에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되었고, 밤이면 생면부지의 남자들이
25 시키는 대로 벌판을 가로지르고, 숲속을 헤쳐나가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를
26 한참이나, 정말 무지하게 오랫동안 타고 가다가,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27 친척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던 카바용에서 내려, 아저씨의 농가가 있던 퓌제 근처의
28 듀랑스 골짜기로 가서, 그곳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그는
29 누이와 함께 아저씨의 농토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다.
30 50 년대 초조나단이 농사꾼으로 살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 재미를 붙일
31 무렵,아저씨는 그를 군대에 입대시켰고, 그는 3 년 동안의 군 복무 의무를
32 고분고분히 따랐다. 첫해에는 성가신 집단 생활과 병영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에만 온
33 신경을 집중하였다. 둘째 해에는 배를 타고 인도지나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셋째
34 해에는 발과 다리의 총상과 아메바 성 이질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군 병원에서
35 보냈다. 그러다가 1954 년 봄 퓌제로 돌아왔을 때는 그의 누이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36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는 거였다. 아저씨는 조나단에게 곧바로 결혼할 것을 권했고,
37 그것도 이웃 마을 로리에 사는 마리 바꾸슈라는 처녀와 하라고 정해주었다. 그 여자를
38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조나단은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그것도 기꺼운
39 마음으로 따랐다. 결혼생활이 무엇인지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마침내 아무런
40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단조로운 평화를 맛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41 그것이야말로 그가 늘 꿈꾸어왔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결혼 후 불과 4개월 만에
42 마리는 사내 아이를 낳았고, 같은 해 가을에 튀니지 사람으로 마르세이유에서 온 과일
43 장수와 눈이 맞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44 그런 모든 불상사를 겪고 나자 조나단 노엘은 사람들을 절대로 믿을 수 없다는
45 것과, 그들을 멀리 해야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46 마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되면서, 비웃음 그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단지
47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성가셨기 때문에 난생 처음 독자적으로
48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농협으로 가서 그동안 저금해 두었던 돈을 몽땅 찾고,
49 짐을 꾸려 파리로 떠났던 것이다.
50 파리에서 그는 큰 행운을 두 개나 잡았다. 세브르가에 있는 어느 은행의 경비원으로
51 취직이 되었고, 플랑슈 가에 있는 집 7층에 코딱지만한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52 방까지 올라가려면 뒷마당을 지나, 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좁은 계단을 올라가서,
53 가끔씩 햇살이 비취는 창문이 하나 나 있는 비좁은 복도를 지나가야만 했다. 복도에는
54 회색 페인트 칠을 한 문마다 번호가 붙여져 있는 작은 방들이 20여 개 있었는데, 그
55 중에 제일 끝에 있고 번호가 24번인 방이 조나단의 방이었다. 방은 길이가 3.4
56 미터이고, 폭은 2.2 미터이며, 높이가 2.5 미터였다. 방 안에 가구라고는 유일하게
57 안락한 침대가 하나, 책상이 하나, 의자가 하나, 전등이 하나 그리고 옷걸이가 하나
58 있을 뿐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60 년대가 되어서야 음식을 끓여 먹을 수 있는
59 전기 기구와 난방기를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전력이 강화되었고, 수돗물도 사용할 수
60 있게 되어 각 방마다 세면대와 보일러가 따로 설치되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61 제일 위층에 살던 사람들은 사용이 금지되었던 알콜 버너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찬
62 음식을 먹어야만 했고, 싸늘한 방에서 잠을 잤고, 양말을 빨 때와 몇 가지 안되는
63 식기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을 씻을 때도 복도에 단 하나 있고, 공동 변소 바로
64 옆에 있던 세면대를 사용해야만 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조나단에게는 아무런
65 문제도 되지 않았다. 굳이 편안한 곳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만 삶의
66 마땅찮은 불상사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어느 누구도 자기를 내쫓을 수
67 없는 그런 확실한 곳으로서, 온전하게 자기 혼자만의 소유로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68 24 호실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그는 그곳이 바로 그런 곳이 되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69 있었다. '바로 이거야. 이런 곳을 언제나 갈망했었지. 이곳에서 살자.' (대부분의 많은
70 남자들이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자기와 일생을 함께 할 여자요, 자기의
71 소유가 될 여자요, 인생이 다 하는 순간까지 곁에 머물러 있을 여자라는 생각을
72 번개처럼 뇌리에 떠올린다는, 이른바 첫눈에 반한 사랑 같은 감정이었다.)
73 조나단 노엘은 그 방을 옛날 돈으로 월세 5천 프랑씩 내기로 하고 들어가, 그곳에서
74 날마다 아침이면 세브르가에 있는 일터로 갔다가, 저녁이면 빵과 소시지와 사과와
75 치즈를 사갖고 돌아와서는 그것을 먹고, 자고 또 행복해 했다. 일요일이 되면 방에서
76 좀처럼 나가지도 않았고, 방을 반들반들하게 닦거나, 침대보를 새 것으로 바꿔주는
77 일을 하곤 하였다. 그렇게 그는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가면서, 십 년이 가고 또 십
78 년이 흐르도록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살았다.
79 물론 그 동안 외부적인 변화가 있기는 하였다. 이를테면 방세가 변했고, 입주해 있는
80 사람들의 면면이 바뀌었다. 50 년대만 하더라도 다른 방에는 파출부로 일하는
81 여자들이 많이 살았고, 갓 결혼한 신혼 부부나 퇴직한 노인들이 살았다. 그 다음에는
82 스페인 사람이나 포르투갈 사람 혹은 북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이사를 오고 가는
83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60 년대 말에는 대학생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살았다. 그
84 후에는 스물네개의 방이 다 임대되지 못하게 되었다. 많은 방들이 그냥 빈 채로
85 있거나, 아래층에 살림집을 꾸미고 사는 다른 세대의 창고나 혹은 가끔씩 쓰는 손님용
86 방으로 이용되곤 하였다. 조나단 노엘의 방인 24 호실은 세월이 흐르면서 비교적
87 안락한 주거지로 변했다. 그 사이에 침대도 새 것으로 바꾸었고, 붙박이장을 하나
88 마련했으며, 7.5 평방 미터의 방 바닥에 잿빛 카페트를 깔았고,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
89 세면대가 있는 구석에 라커 칠을 한 빨간색 벽지를 붙여놓기도 하였다. 라디오,
90 텔레비젼, 다리미도 들여놓았다. 식료품은 과거처럼 자루에 넣어 창 밖으로 걸어두며
91 보관하지 않고, 세면대 밑에 있는 난쟁이 냉장고에 넣어두게 되어 뜨거운 여름
92 날이라도 버터가 녹는다든가, 소세지가 말라 비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93 침대 머리맡에는 선반을 하나 매달아서 17권도 넘는 책들을 꽂아놓았다. 포켓 의학
94 사전 세 권을 비롯하여 크로마뇽 인과 청동기 시대의 주조 기술, 고대 이집트,
95 에투루리아 인 그리고 프랑스 혁명을 다룬 몇 권의 아름다운 화보집, 범선에 관한 책
96 한권, 여러 가지 깃발에 관한 책 한 권, 열대 지방에 사는 동물에 관한 책 한 권,
97 알렉상드르 뒤마 1세의 소설책 두 권, 생시몽의 회고록, 전골 요리책 한 권, 라투스
98 사전 한 권과 직무상의 권총 사용 규정에 있어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을 다룬
99 경비원을 위한 요점 정리 책자 한 권 등이 있었다. 침대 밑에는 포도주도 십여 병이나
100 모아두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1998 년 퇴임식 날 마시려고 특별히 준비해 둔 '사토
101 슈발 블랑'이라는 고급 포도주도 한 병 끼어 있었다. 각별하게 신경을 써서 설치한
102 전등불은 조나단이 방 안의 세 곳침대 머리맡이나 침대 발치 혹은
103 책상,가운데 어느 곳에서든지 앉아 신문을 읽더라도 눈이 부시지 않고, 신문에
104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하였다.
105 그렇게 물건을 많이 들여놓다 보니 방은 마치 너무 많은 진주알을 품은 조개처럼
106 안쪽으로 빠듯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각도의 절묘한 공간 활용은 그 방을 그냥
107 단순히 코딱지만한 방이라기 보다는 배의 선실이나 고급 기차의 침대칸처럼 보이게
108 만들었다. 그러나 그 방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30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왔다.
109 그곳은 조나단에게 있어서 불안한 세상의 안전한 섬 같은 곳이었고, 그의 확실한
110 의지처였으며, 도피처였다. 그것은 그를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애인, 정말 애인 같은
111 것이었다. 그 작은 방은 저녁에 그가 돌아오면 그의 체온을 따스하게 감싸주었으며,
112 그가 필요로 할 때는 영혼과 실체로서 항상 그의 곁에 있어주었고, 결코 그를 버리지
113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오직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을
114 만한 것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단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115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나이가 오십이 넘었고, 그 많은 층계를
116 오르는 일이 가끔씩 힘에 부치고, 번듯한 부엌과 자기 혼자만 사용할 수 있는 욕실을
117 갖춘 제대로 된 아파트를 임대할 수 있을 만큼 봉급을 받게 되기는 하였어도
118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그는 층실하려고 노력하였고, 오히려 그것에
119 밀착하여 그것과 좀 더 가깝게 자신을 묶어 매고자 계획하였다. 그 방을 아^예
120 자기 것으로 구입함으로써 그것과 자신과의 관계를 영원히 깰래야 깰 수 없는 관계로
121 만들 생각이었다. 집 소유주인 라살르 부인과의 계약도 이미 마쳤다. 방 값은 새로
122 나온 돈으로 5 만 5 천 프랑을 내기로 했다. 그중에 4 만 7 천 프랑은 벌써 지불을
123 끝낸 상태였다. 나머지 8천 프랑만 연말에 내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124 마침내 그의 소유가 될 것이고, 죽음이 그 둘을 갈라놓기 전에는 이 세상의 그 어느
125 것도 조나단과 그가 사랑하는 방을 떼어놓을 수 없게 될 터였다.
126 여기까지가 비둘기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84 년 8월 어느 금요일 아침까지의
127 상황이었다.
128 조나단이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실내화를 찾아 신고, 나이트
129 가운을 입은 채 여느 아침처럼 면도를 하기 전에 복도에 있는 공동 변소를 찾아 나설
130 참이었다. 문을 열기 전에 그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귀를 문에
131 바짝 갖다댔다. 같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그는 달가워하지 않았고,
132 더구나 이른 아침에 잠옷과 나이트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그것도 하필이면 변소에
133 가는 길에 만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화장실이 사용중이라는 것을
134 알게 되는 것만도 그에게는 상당히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세들어 있는
135 사람 가운데 누군가와 화장실 앞에서 맞닥뜨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운
136 노릇이었다. 그런 경우를 25 년 전인 1959 년 여름에 딱 한 번 당했는데, 그때의 일을
137 생각하면 그는 아직도 여전히 등에 소름이 끼쳤다. 상대방을 보고 동시에 놀라
138 소스라쳤고, 상대가 몰랐었다면 딱 좋았을 일을 상대에게 들킴으로 해서 두 사람이
139 똑같이 익명성을 잃어버렸었다. 둘 다 똑같이 한 발 물러섰다가, 또 다시 앞으로
140 다가섰으며, 성급하게 부랴부랴 예의를 갖추려고 했었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아니
141 괜찮아요, 아저씨." "하나도 안 급합니다." "아니에요." "먼저 하시지요." "제가
142 드리고 싶은 말씀인 걸요." 그런 모든 짓거리를 잠옷 바람으로 했었다! 그는 그런
143 꼴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고, 또 미리 조심스럽게 밖의 소리를 엿들어왔던 습관
144 덕택에 그 이후에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문 밖에서
145 나는 소리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복도에서 나는 소리를 그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
146 탁탁거리는 소리라든가, 뭔가 스쳐지나가는 소리, 심지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147 침묵의 의미마저 그는 다 꿰뚫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아침 그는이미 불과
148 몇 초 전에 문에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기 때문에,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149 것과 화장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아직 모두 잠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왼쪽
150 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오른쪽 손으로는 용수철 자물쇠의 손잡이를
151 돌린 다음, 빗장을 열고, 문을 가볍게 밀며 활짝 열었다.
152 발 한쪽을 문지방 너머로 거의 떼어 놓을 뻔한 순간이었다. 이미 왼쪽 다리를 든
153 다음이었고그가 그것을 목격하였을 때 그의 발은 막 걸음을 옮겨놓으려던
154 참이었다,그것이 그의 문밖에 앉아 있었다. 문지방에서 불과 20센티미터도
155 떨어지지 않은 곳에, 창문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의 창백한 역광을 받으며 있었다.
156 납회색의 매끄러운 깃털을 한 그것은 황소 피처럼 붉은 복도의 타일 위에, 빨간색이며
157 갈퀴 발톱을 한 다리를 보이며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비둘기였다.
158 새는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누인 채 왼쪽 눈으로 조나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59 그 눈, 작고 둥그스름한 원반형이었고, 갈색에 가운데가 까만 그것은 보기에 너무나도
160 끔찍스러웠다. 그것은 마치 머리털에 꿰매어 놓은 단추처럼 보였고 속눈썹도 없는
161 듯이, 광채도 없이, 그냥 무턱대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끔찍스럽게 무표정한 시선을
162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눈 속에 교활한 머뭇거림이 숨어 있는 것
163 같기도 하였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무표정하거나 머뭇거리는 듯 보이지 않았고,
164 외부의 빛을 몽땅 빨아들이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은 빛을 전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165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광채나 희미한 빛조차도
166 그 눈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살아 있는 흔적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167 아무것도 보지 못할 눈이었다. 바로 그 눈이 조나단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168 그는 죽을 만큼 놀랐다그때의 순간을 나중에 그렇게 표현할 수도
169 있었겠지만,그 말은 사실상 옳지 않았다. 정작 그를 더욱 놀라게 했던 순간은
170 좀더 나중에 있었다. 그때야말로 그는 까무러치게 놀라 죽을 뻔했다.
171 5초, 어쩌면 10초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그에게는 그 시간이 영겁 같은
172 시간이었다,손으로는 손잡이를 그대로 잡고, 발은 걸음을 떼어놓으려는 자세로
173 위로 든 채 마치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174 못하면서 문지방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약간의 미동이 있었다. 비둘기가 두 발의
175 위치를 바꾸었는지, 날갯죽지를 약간 움직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어쨌든 새의
176 몸이 약간 꿈틀대는 듯 하더니,그와 동시에 눈꺼풀이 눈을 덮어버리는
177 것이었다. 눈꺼풀이 하나는 아래쪽에서, 또 하나는 위쪽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실제로
178 그것은 눈꺼풀이라기보다는 고무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씌우개처럼 보였고, 아무것도
179 없다가 갑자기 생겨나 순식간에 눈을 삼켜버린 입술같은 것이었다. 눈깜짝할 사이에
180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조나단은 공포로 몸서리를 쳤다. 너무 놀란 나머지
181 머리카락도 빳빳하게 섰다. 비둘기의 눈이 미처 다시 뜰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182 그는 후다닥 방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돌리고 부들부들
183 떨며 비틀비틀 침대까지 가, 마구 방망이질 쳐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털푸덕
184 주저앉았다. 이마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목덜미와 등허리에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185 그의 머리에 우선 떠오르는 생각은 심장 마비나 뇌졸중 혹은 최소한 혈액 순환 장애
186 정도는 걸릴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나이 오십부터는 아주 사소한 계기만 생겨도 그런
187 험한 질병에 걸리게 된다는 생각과 자신이 이미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다는 자각
188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대에 모로 누운 다음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어깻죽지
189 위까지 담요를 끌어올려 덮고그가 언젠가 포켓용 의학 사전에서 전형적인 심장
190 마비 증세라고 읽은 바 있는,경련을 일으킬 듯한 심한 통증과 가슴 부위 및
191 어깨 근처에 콕콕 찌르는 듯한 증세와 또는 의식이 서서히 꺼져가는 현상이
192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것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 박동은 차츰
193 진정이 되었고, 피는 다시 머리와 사지 쪽으로 고르게 돌았으며, 뇌졸중의 확실한
194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가락과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고,
195 얼굴도 찡그려볼 수 있었으므로 신체 기관과 신경이 그런 대로 정상이라는 증거가
196 되었다.
197 대신 그의 뇌리에는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공포의 사념들이 무더기로 떠오르며 마치
198 한 무리의 까마귀 떼들처럼 머리 속을 시끄럽게 소리치며 휘저었고, 또 자기들끼리
199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하였다.
200 '너는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를 꽥 지르는 것 같았다.
201 '너는 이제 늙었고 끝났어. 기껏 비둘기한테 놀라 자빠지다니! 비둘기 한 마리가
202 너를 방 안으로 몰아넣고, 꼼짝 못하게 만들고, 가두어놓다니! 조나단, 너는 이제 죽은
203 목숨이야. 설령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거야. 네 인생은
204 실패한 거야. 한낱 비둘기가 망쳐놓았으니 넌 망한 거야. 넌 새를 죽여야 돼. 그러나
205 넌 그걸 절대로 죽이지 못해. 파리 한 마리도 넌 잡지 못해. 아니, 파리 정도라면 할
206 수도 있겠지, 파리가 딱 한 마리라면, 혹은 모기 한 마리나 작은 딱정벌레라면 그럴
207 수도 있겠지만,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절대로, 더구나 비둘기처럼 몸무게가 한
208 파운드나 되면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죽이지 못해. 그것보다는 차라리
209 총으로 사람을 쏘는 편이 쉽겠지, 따^당! 그렇게 하는 것이 신속하고, 겨우 8
210 밀리미터 밖에 안 되는 구멍만 남기게 될 거야. 뒤가 깨끗하고 법적으로도 허용되는
211 일일 테니까. 긴급한 상황에서는 허용되는 법이잖아. 더구나 무장 경비원의 근무 규정
212 제 1조를 보면 오히려 그렇게 하라고 명시되어 있지. 네가 사람을 향해 총을 쐈다면
213 어느 누구도 너를 비난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비둘기를 그랬다면? 비둘기를 어떻게
214 쏜단 말인가? 그것이 퍼덕거릴 테니까 총알이 쉽게 빗나갈 테고, 비둘기를 총으로
215 쏜다는 것은 야만적인 불법 행위요 금지된 짓이니까 결과적으로 직무상 부여받은
216 무기를 압수당하고 직장을 잃게 되겠지. 비둘기를 총으로 쐈다고 감옥으로 끌려갈지도
217 모르지. 아니, 넌 그것을 절대로 죽일 수 없어. 그렇다고 살 수도, 그것과 더불어서
218 함께 살 수도 없어. 결코 안 돼. 비둘기가 안에서 살고 있는 집에 인간이 같이 살
219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둘기는 혼란과 무질서의 대명사가 될 거야. 예측을 불허한 채
220 울면서 아무데로나 마구 돌아다니고, 발톱으로 할퀴는가 하면 눈을 콕콕 찌르기도 할
221 비둘기, 쉴 새 없이 집을 더럽히고, 무시무시한 박테리아 균을 털어놓거나, 뇌막염을
222 유발하는 바이러스를 몰고 다닐 비둘기. 더구나 그것은 혼자 살지도 않겠지. 다른
223 비둘기를 꼬드겨서 데리고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짝짓기가 이루어질테고, 그렇게 되면
224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새끼가 번식되겠지.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너를 포위하게 될
225 거야. 넌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할거야. 굶주려 죽게 될 거야. 네 자신의
226 배설물 냄새로 질식할 수도 있겠지. 마침내는 창 밖으로 몸을 던질 테고, 네 몸은 보도
227 위에 만신창이가 되어 쭉 뻗게 될 거야. 아니, 넌 너무 겁이 많아. 방문을 걸어 잠근
228 채 도와달라고 소리칠지도 모르지. 사람들이 사다리를 갖고와서 비둘기로부터 너를
229 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넌 소방관을 찾을거야. 겨우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230 말이야! 집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될테고, 근방에 사는 사람들의
231 경멸의 대상이 되겠지. "저기 노엘 씨 좀 봐!"라고 소리치면서 사람들은 네게
232 손가락질을 하게 될 거야. "저것 봐, 노엘 씨가 비둘기 한 마리 때문에 구조를
233 요청했대!" 사람들은 널 정신 병원에 보내려고 할 거야. 오! 불쌍한 조나단, 네가 처해
234 있는 현상황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어. 넌 망했어.'
235 그런 따위의 사특한 생각들이 그의 머리 속에서 꽥꽥 소리치며 외쳐댔고, 조나단은
236 너무나 당혹스럽고 절망적인 나머지 유년 시절 이후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237 절박한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238 "오, 하느님, 하느님."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239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 왜 제게 이다지도 큰 벌을 내리시나이까? 하늘에 계신
240 아버지시여, 제발 저를 저 비둘기로부터 구해주소서! 아멘!"
241 보다시피 그것은 제대로 형식을 갖춘 기도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억 속에 남아
242 있는 초보적인 종교 교육의 토막들을 어설프게 짜맞춰서 토해내 놓은 꼴이라고
243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비록 그렇기는 하였지만 어느 정도 정신 집중을 해야만 했기
244 때문에 온갖 잡념으로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기는 하였다.
245 그리고 그것과는 종류가 다른 것이 좀더 강한 힘으로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기도를
246 마치기가 무섭게 참을 수 없는 요의를 느꼈으며, 그것은 즉시 어디로든지 가서 볼
247 일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가 누워 있는 훌륭한 매트리스는 물론이거니와 멋진 잿빛
248 카페트가 더럽게 젖을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로 하여금 정신이 퍼뜩
249 들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는 문 쪽으로 난감한
250 시선을 던졌다 아니, 그 문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갈 수 없었다. 설령
251 애꿎은 비둘기가 그 사이에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화장실까지 갈 자신이
252 없었다,세면대로 가서 나이트 가운의 앞섶을 열고, 잠옷 바지를 밑으로 내린
253 다음, 수도꼭지를 틀고, 세면기 안에다 오줌을 눴다.
254 전에는 그런 짓을 한번도 한 적이 없었다. 백색의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고, 세수는
255 물론이거니와 그릇마저 씻는 용도로 사용해 온 세면기에 오줌을 누고 있다는
256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자기의 인격이 이 정도로 형편 없이 땅에
257 떨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으며, 어떤 경우든 이런 신성 모독적인
258 행위를 범할 만한 입장에 처하게 되리라는 것을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일을 다
259 마치고도 한참 동안 계속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다음 자신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260 행위의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려고 액체 세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261 "딱 한 번 그랬으니까 괜찮아."
262 세면대와 방과 자기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263 "한 번 한 것은 괜찮아. 꼭 한 번 다급한 사정으로 한 짓이니까 다시는 그런 일이
264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265 그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씻고, 액체 세제병을 치우고, 걸레를 짜는자주
266 해와서 몸에 아주 익숙해진,행동들이 그로 하여금 다시 정신을 가다듬을 수
267 있게 하였다. 시계를 보았다. 방금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때 7시
268 15분이면 면도를 끝내고, 침대도 정리를 끝내놓을 시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269 뒤처진 것은 부득이 어쩔 수 없이 아침 식사를 거르면 빠듯하게 만회할 수 있을 것
270 같았다. 실제로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그의 계산대로라면,평소보다도
271 7분이나 빨랐다. 중요한 것은 그가 8시 5분에 방을 나서야 8시 15분까지 은행으로 갈
272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보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지만 어쨌든
273 그에게는 아직 45분이라는 유^예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긴 시간이었다. 방금 전에
274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심장마비를 겨우 모면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45분은 많은
275 시간이었다. 더구나 꽉 찬 방광 때문에 차츰 더해가던 압박감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276 사람에게 있어서의 그것은 실제의 곱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우선 그는 마치 아무일도
277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기로 맘을 먹고,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해야 될
278 일들을 그냥 하기로 했다. 세면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면도를 시작했다.
279 면도를 하는 동안 그는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280 "조나단 노엘, 넌 2 년 동안 인도지나에서 군복무를 했고, 또 그곳에서 온갖 힘겨운
281 상황들을 잘 견뎌냈었지. 너의 용기와 지혜를 총동원하고,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282 행운이 따라준다면 넌 이 방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어."
283 그런데 막상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또 어떻게 해야 되는 건지에 대한
284 궁금증이 생겼다. 정말로 문 앞에 있는 그 흉물스러운 새 옆을 지나서, 아무런
285 불상사도 당하지 않고 층계가 있는 곳까지 간다면, 그렇게 안전 지대로 피신한다면 그
286 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직장으로 출근하고, 낮 시간을 무사히
287 넘길 수는 있겠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288 (오늘 저녁이 되면 어디로 가야 되지? 밤은 또 어디서 보내고?기왕에
289 도망치는 마당에,비둘기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290 그 새하고는 한 지붕 아래서 단 하루, 단 하룻밤, 단 한 시간이라도 살 수 없다는 것은
291 내 확고부동한 생각이야. 그러니 오늘 밤, 아니 그 이후의 며칠도 호텔에서 묵을
292 준비를 해야겠군. 그렇다면 면도기와 칫솔과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챙겨 가야지. 그런
293 것들 말고도 개인 수표책도 챙이고, 혹시 모르니까 저금 통장도 가지고 가야겠어.
294 수표로 끊는 통장 구좌에는 1천2백 프랑이 들어있다. 그 정도라면 2주일은 버틸 수
295 있어. 물론 방을 싼 것으로 얻는다는 전제를 한다면 그렇지. 그렇지만 그래도 여전히
296 비둘기가 방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다면, 그 때는 다시 저금해 두었던 돈도 꺼내
297 써야만 하겠군. 통장에는 6천 프랑이 들어 있지. 상당히 많은 돈이야. 그 돈으로라면
298 몇 달이건 호텔에서 지낼 수 있을 거야. 거기에다가 매달 실수령액으로 3천7백 프랑을
299 월급으로 받고 있잖아. 그래도 연말에 8천 프랑을 라살르 부인에게 마지막 잔금으로
300 지불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지. 방 값으로 말이야. 더 이상 살지도 않을 방 값을
301 내는 꼴이군. 마지막 잔금 내는 날짜를 조금 늦춰달라고 라살르 부인에게 둘러댈
302 구실이 필요할텐데. 아무리 그래도 구입하기로 약속한 방의 출입을 비둘기가 막고
303 있어서 몇 달째 호텔에서 묵고 있기 때문에 잔금으로 남은 8천 프랑을 낼 수 없다고
304 말할 수는 없지 정말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야)
305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금화가 다섯 개 있다는 것이 갑자기 머리 속에
306 떠올랐다. 하나에 6백 프랑의 값어치는 충분히 될 다섯 개의 나폴레옹 금화들은
307 알제리가 전쟁중이던 1958 년에 인플레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두었던 것들이었다.
308 (그것들을 필히 가져가야지 그것말고도 어머니의 가는 황금 팔찌도 있어.
309 트랜지스터 라디오도 있고. 그리고 전직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지급되었던
310 고급스러운 은도금 볼펜도 있지. 그런 진귀한 물건들을 다 팔아버리고, 아주 근검
311 절약한 생활을 한다면 연말까지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더라도 8천 프랑을 라살르
312 부인에게 낼 수 있을 거야.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내년 1월부터는 방이 내 것이니까
313 방삯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어서 사정이 훨씬 수월해질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비둘기가
314 이 겨울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잖아? 비둘기의 수명이 얼마나 되더라? 2 년, 3 년, 10
315 년? 게다가 그 새가 이미 늙은 것이었다면? 혹시 1주일 안에 되는 건 아닐까? 아니,
316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몰라. 그냥 죽으려고 이곳까지 왔는지도 모르지)
317 면도를 마치고, 받아두었던 물을 내보내고, 다시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발도
318 닦았다. 이를 닦은 다음 다 쓴 물을 다시 내보내고, 걸레로 세면대 물기를 깨끗하게
319 닦았다. 그리고 침대도 정리했다.
320 옷장 아래에는 더러운 옷들을 모아두었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세탁소로 가져가기
321 위해 빨랫감을 보관하는 낡은 가방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꺼내어 속을 비운 다음
322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그가 1942 년 샤렝통에서 카바용으로 갈 때 들었던
323 가방이고, 1954 년 파리로 올 때 썼던 것이기도 했다. 그 허름한 가방을 이제는 침대
324 위에 올려놓고, 더러운 빨랫감이 아니라마치 여행을 떠나는
325 사람처럼,깨끗한 옷가지, 구두, 세면용품, 다리미, 수표책, 귀중품 등으로
326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그의 눈에 굵은 눈물 방울이 맺혔다. 이번에는 부끄러워서가
327 아니라 절망적인 허탈함 때문이었다. 마치 인생이 30 년 전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것
328 같았고, 지난 30 년이 송두리째 다 날아가버리는 느낌이었다.
329 짐을 다 챙기고 나니 8시 15분 전이었다. 옷을 갈아입었다. 먼저 평상시에 입던
330 유니폼을 입었다. 회색 바지, 파란색 셔츠, 가죽 잠바, 권총집이 달려 있는 가죽벨트,
331 회색 모자. 그런 다음 비둘기와 마주칠 경우를 대비하여 복장을 갖추기 시작했다.
332 생각만 해도 정말 몸서리가 처지는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지 그의 몸과 접촉하는
333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의 다리 복숭아뼈를 쫀다든지, 퍼덕거리며 날다가 날개 부위가
334 그의 손이나 목에 닿는다든지, 심지어 갈퀴 발톱처럼 벌어진 그 발로 그의 몸 위에
335 내려앉는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벼운 단화를 신지 않고, 보통 때라면
336 대개 1월이나 2월에 신고 다녔던 것으로, 바닥이 새끼양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목이
337 길며 가죽이 억센 장화를 신었다. 거기에다가 겨울 외투를 꺼내 입고 단추를 위부터
338 아래까지 다 잠근 다음, 털목도리를 턱까지 바짝 닿도록 두르고, 손은 속에 털이 있는
339 장갑을 껴 감췄다. 오른쪽 손으로는 우산을 들었다. 그렇게 완전 무장한 모습으로
340 방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하기 위해 8시 7분 전에 모든 준비를 끝냈다.
341 모자를 벗고, 귀를 문에 바짝 갖다댔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자를 다시 머리
342 위에 얹고 이마까지 푹 눌러쓴 다음, 가방을 문가로 들어다 놓았다. 오른쪽 손을
343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산을 손목에 걸고,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344 왼손으로는 안전 자물쇠의 꼭지를 잡았다. 빗장을 여니 문이 조금 열렸다. 밖을 살짝
345 훔쳐보았다.
346 비둘기는 더 이상 문 앞에 있지 않았다. 그것이 앉아 있었던 타일 위에는 5 프랑
347 짜리 동전 크기만한 초록색 에메랄드빛 똥과 문 사이로 부는 바람에 살짝 나부끼는
348 작은 흰색 깃털이 보였다. 조나단은 속이 몹시도 메슥거렸다. 당장 문을 도로
349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의 가장 솔직한 심정은 바깥의 그
350 혐오스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안전한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었다. 그
351 순간 그는 새똥이 단지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저곳 여러 곳에 있는 것을
352 보았다. 그의 시야에 잡히는 복도 전체가 시푸르뎅뎅하고 축축하고 번들거리는 똥으로
353 지저분하게 더럽혀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구역질 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자
354 역겨움이 더 심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이상한 반응이 생겼다. 만약에 새똥이
355 하나만 있고 깃털도 하나뿐이었다면 그는 필경 뒷걸음질 치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356 닫고 영원히 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전체 복도를 오물로 더럽힌
357 이상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에서,새로운 용기가
358 생겨났다. 그가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359 이제야 비로소 비둘기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1.5 미터쯤 떨어진 복도 맨 끝 구석에
360 웅크리고 있었다.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고, 조나단도 그쪽으로는 아주
361 잠시 동안만 시선을 던졌기 때문에 그것이 잠들었는지, 깨어났는지, 아니면 눈을 뜨고
362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것은 그가 알고 싶지 않은
363 것들이기도 했다. 아^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364 들었다. 전에 언젠가 열대 지방에서 사는 동물에 관한 책을 보았을 때 어떤 동물들,
365 예를 들어 오랑우탄 같은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하면 공격한다는
366 것을 읽은 생각이 났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367 않는다는 것이었다. 혹시 비둘기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368 의심이 들었다. 어쨌든 조나단은 비둘기가 거기 없는 것처럼, 혹은 적어도 그것을 보지
369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370 시푸르뎅뎅한 똥 사이로 가방을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복도 쪽으로 끌어냈다.
371 그런 다음 우산을 펴서 왼손으로 들고, 그것으로 방패처럼 가슴과 얼굴을 가린 채
372 바닥에 있는 똥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복도 쪽으로 걸어나와 등 뒤로 문을
373 닫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다지기는 하였어도
374 가슴은 마구 방망이질을 쳐댔고, 장갑을 낀 손으로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낼 때는
375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덜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우산을 놓칠 뻔해서 어깨와
376 뺨 사이에 그것을 꼭 끼워 넣으려고 오른쪽 손으로 잡다가 그만 열쇠를 바닥에
377 떨어뜨리고 말았다. 똥 바로 옆자리였다. 하는 수 없이 허리를 구부려 그것을 꽉 잡고,
378 가슴이 두근거려 세 번씩이나 열쇠 구멍을 제대로 찾지 못하다가, 열쇠가 구멍에
379 들어갔을 때는 연거푸 두 번이나 구멍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가에는 새가
380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는 것만 같았다^5,5,5&. 어쩌면 그것은 우산이 벽에
381 긁히며 난 소리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또다시 분명하고도 아주 짧게
382 마른 날개가 푸석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383 열쇠 구멍에 있던 열쇠를 황급히 꺼내들고 가방을 움켜진 채 냅다 달음박질을 쳤다.
384 활짝 펼쳐진 우산이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났고, 가방은 다른 방 문들에 마구
385 부딪치며 뒤뚱거렸고, 복도 중앙쯤에 있던 열린 창문틀이 길을 가로막았지만, 그는
386 막무가내로 앞쪽으로 내달음질쳤다. 그것도 너무나 무모하고 고집스럽게 하는 바람에
387 우산이 발기발기 찢겨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388 아무것도 상관할 바가 없었다. 다만 멀리, 더 멀리, 더 멀리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389 층계가 있는 곳에 다다라서야 겨우 잠시 멈춰 서서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접었고,
390 잠깐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아침 햇살의 투명한 빛줄기가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391 있었고, 복도의 후미진 응달에 한 다발의 날카로운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392 안을 그냥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우선 눈을 감았다가 굳이 다시 보려고 하자
393 그제서야 어두컴컴한 구석에 있던 비둘기가 몇 걸음 뒤뚱거리며 빠르게 걸어나와 다시
394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그의 방 바로 앞 자리였다.
395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돌린 다음 그는 층계를 내려갔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396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397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진정되었다. 3층 계단 입구쯤에
398 이르자 갑자기 몸이 후끈거리며 더웠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가죽 장화를
399 신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곳이 아래층 세대들의 부엌과 뒷계단이
400 연결되는 곳이었으므로 장보러 갔던 가정부가 나타나든가, 빈 술병을 내놓는 리고
401 씨와 언제라도 마주칠 수 있었다. 또는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생겨서 라살르 부인이
402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었다그 부인은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었고, 마침 코를
403 찌를 듯한 커피 향기가 복도를 메우는 것으로 봐서 이미 일어나 있음이 분명했다.
404 그러니 라살르 부인이 부엌 뒷문을 언제라도 열 수 있을텐데, 뜨거운 8월에 겨울 옷을
405 잔뜩 꾸려입은 괴팍스러운 조나단과 문앞에서 마주칠 수도 있었다,남을
406 기겁하게 만들어놓고 무심히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슨
407 설명이라도 하나 해야 될텐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한담? 거짓말을 하나 준비하기는 해야
408 할텐데 뭐라고 하지?)
409 그의 옷차림에 맞을 성싶은 변명은 쉽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설프게 변명을
410 늘어놓아 보았자 그를 미쳤다고 볼 것이 뻔한 노릇이었다. 그는 어쩌면 자기가 정말로
411 미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412 가방을 내려놓고 구두를 꺼낸 다음, 장갑과 외투와 목도리와 장화를 벗었다. 그런 후
413 구두를 신고 목도리와 장갑과 장화를 벗었다. 그런 후 구두를 신고 목도리와 장갑과
414 장화는 가방 속에 꾸겨 넣고, 외투는 팔에 걸쳤다. 그러고 나니 그가 생각했던 대로
415 남들 보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복장이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빨래방으로 빨래를
416 가져가고, 외투는 세탁소에 맡기러 간다고 말을 둘러댈 수도 있는 있이었다. 그는 한결
417 가벼워진 마음으로 층계를 계속 내려갔다.
418 뒷마당에서 집 청소와 관리를 하는 로카르 부인과 맞닥뜨렸다. 로카르 부인은 빈
419 쓰레기통을 작은 수레에 싣고 집 안으로 끌고 오려던 중이었다. 그 여자를 보자
420 가슴이 찔끔했고, 돌연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이미 모습을 들켰기 때문에
421 어두운 계단 밑으로 도로 들어갈 수도 없었으므로 그냥 내쳐 걸어야만 했다.
422 "안녕하세요, 노엘 씨."
423 의도적으로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곁을 지나치려는 조나단에게 로카르 부인이
424 그렇게 안사말을 건넸다.
425 "안녕하시오, 로카르 부인."
426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소리로 그가 인사에 답했다. 그것뿐 더 이상 아무 말도
427 주고받지 않았다. 지난 10 년동안그렇게 오랜 시간을 로카르 부인이 그 집에
428 살아왔지만,그는 고작 아침 저녁으로 '안녕하세요, 부인'이란 말을 하거나,
429 우편물을 받으면 '고맙습니다, 부인' 따위의 말만 해왔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로카르
430 부인에게 특별히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심통 사나운
431 사람이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여자는 전에 일했던 전임자와, 또 그 이전의
432 전 임자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집 청소를 하고 관리를 하는 여자들의 전형적인
433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나이가 40 대 후반이나 60 대 후반 사이에 어디쯤인지 통
434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통 그렇듯이 복도를 걸을 때면
435 뚱뚱한 몸짓으로 약간 절룩거리며 걸었고, 백지장처럼 허연 혈색에다 곰팡이 냄새
436 같은 것을 풍기기도 했다. 쓰레기통을 집 밖으로 끌고가거나 혹은 다시 끌고들어오는
437 일, 아니면 계단을 청소하거나 잠깐 시장을 보러 나가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길과
438 마당 사이에 있고, 네온 불빛이 새어나오는 작은 숙소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439 바느질을 하거나, 다림질을 하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거나,
440 약쑥으로 만든 술을 마시는 등 그런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441 생활을 했다. 정말로 로카르 부인에게 특별한 반감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렇게
442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는 여자들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에게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
443 사실이었다. 그들이 직업상 늘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의 눈초리로 보기
444 때문이었다. 그리고 로카르 부인은 유독 조나단을 특별히 끈덕지게 감시하는 특기를
445 갖고 있었다. 로카르 부인이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게 두는 사람은 한 명도
446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을
447 만큼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에서 의자에 앉아
448 있다가주로 이른 오후 시간이나 저녁식사 시간 후에,잠깐 졸다가도,
449 누군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면 그 즉시 눈을 뜨고 누가 그랬는지
450 쳐다보곤 했다. 일찍이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로카르 부인처럼 조나단의
451 행동거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게는 사실 친구도 없었다. 또 은행에서의
452 그의 존재는 한낱 업무상 비치해 둔 물품 같은 신세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고객들은
453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그냥 은행의 부속품쯤으로 여기는 듯 했다. 슈퍼마켓이나,
454 거리에서나, (마지막으로 탔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버스에서도 그의
455 익명성은 다른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지켜질 수 있었다. 오직 유일하게 로카르
456 부인만큼은 그를 보면 꼬박꼬박 아는 척을 했고, 날마다 적어도 두 번은 어설프게나마
457 관심을 표명해 왔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그의 신상에 생기는 작은 변화들은 로카르
458 부인에게 여지없이 발각되었다. 이를테면 어떤 옷을 입고 있다든가, 1주일에 셔츠를
459 몇 번 갈아입는다든가, 머리를 감았다든가, 저녁 식사용으로 무엇을 사가지고
460 돌아왔다든가, 편지를 받았는지와 또 받았다면 누구로부터 받았다던가 하는
461 따위들이었다. 그래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조나단이 로카르 부인을 인간적으로 탐탁치
462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그 여자의 집요한 시선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463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직업적 의무감 때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바이기는
464 하였지만, 어쨌든 그는 그런 시선을 받을 때마다 무언의 비난을 받는 듯한 느낌이
465 들어서, 그 곁을 지나려면세월이 그렇게 많이 지나갔건만,잠깐씩 뜨거운
466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467 (빌어먹을, 도대체 나를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다시
468 감시를 받아야 되는 거지? 이제는 제발 못 본 척 해주어서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둘
469 수는 없는 거야?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을 못살게 하는거지?)
470 더군다나 아침에 큰 사건을 이미 치르고 난 뒤라서 신경이 몹시 예민해져 있었고,
471 자기 자신의 한심스러운 사정이 짐가방과 겨울 외투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기
472 때문에 로카르 부인의 눈길이 유달리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노엘
473 씨'라고 했던 인사말이 괜스레 대단한 야유로 들리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474 늘 마음속에 잘 다독거려 둘 수 있었던 뜨거운 분노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도록 치밀어
475 오르면서 밖으로 표출되었고, 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실행에 옮겼다.
476 로카르 부인 곁을 이미 지나쳐서 자리에 우뚝 섰고, 가방을 내려놓은 후, 그 위에
477 외투를 걸쳐놓은 다음, 뒤쪽을 향해 돌아섰다. 로카르 부인의 성가시기 짝이 없는
478 눈초리와 주제넘은 인사말에 대해서 이제야말로 뼈 있는 한 마디를 해줘야겠다는
479 생각으로 돌아선 것이다. 로카르 부인에게로 걸어가면서도 조나단은 막상 무슨 말을
480 어떻게 해야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다만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고, 할 말도
481 해야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분노는 그 여자를 향해 걸어가는
482 그의 가슴 속에 여전히 이글거렸고, 용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483 마당의 거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그가 길을 막고 섰을 때 로카르 부인은 쓰레기통을
484 제자리에다 갖다 놓고, 막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약 0.5 미터
485 정도 되었다. 로카르 부인의 핏기 없는 허연 얼굴을 조나단은 그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486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포동포동하게 살찐 양볼의 피부는 오래되어서 하늘하늘거리는
487 실크처럼 몹시 부드러워 보였고, 갈색 눈망울은 가까이에서 보니까 얄궂은 호기심이
488 아니라 소녀처럼 수줍어하는 듯한 갸날픈 시선을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색다른
489 느낌이지금까지 그가 로카르 부인에 대해서 품어왔던 인상과는 전혀
490 어울리지는 않았지만,조나단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491 용무를 좀더 공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모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친 다음 아주
492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493 "부인! 할 말이 있습니다."
494 (그 순간에도 그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495 "무슨 일이죠, 노엘 씨?"
496 이렇게 말하더니 로카르 부인은 머리를 약간 움찔하다가 비스듬히 뒤로 젖혔다.
497 조나단은 그런 그가 새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겁먹은 작은 새 같았다.
498 조나단은 자기가 했던 말을 냉담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499 "부인, 한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500 그런 다음 그는 아직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분노를 잠재울 만한 행동을 하나도
501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렇게 말끝을 맺고 있는 것을 들으며 스스로도
502 놀라워했다.
503 "내 방 앞에 새가 한 마리 있어요, 부인."
504 그리고는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505 "비둘깁니다. 내 방 문 바로 앞 타일 위에 있어요."
506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거의 무의식적으로 떠들고 있는 자신의 말에
507 갈피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명을 곁들였다.
508 "그 비둘기가요, 부인. 7층 복도를 오물로 온통 더럽혀놨답니다."
509 로카르 부인은 한쪽 발에 몸무게를 실었다가 다른 발에 옮겨놓는 짓을 몇 번 하고는
510 머리를 좀더 삐닥하게 뒤로 젖히며 말했다.
511 "도대체 어디서 비둘기가 들어왔죠, 노엘 씨?"
512 "나도 모르겠습니다."
513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514 "아마 복도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 게지요. 창문이 열려 있더라고요. 그
515 창문은 꼭 닫아놔야만 합니다. 주택 관리 규정에도 그렇게 적혀 있어요."
516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가 열어놓은 모양이네요."
517 로카르 부인이 말했다.
518 "날씨가 더워서요."
519 "그랬는지도 모르죠."
520 조나단이 말했다.
521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항상 닫혀져 있어야 되는 겁니다. 특히 여름에는
522 더 하죠. 번개라도 치는 날엔 갑자기 꽝 하며 닫히다가 부서져버린다고요. 1962 년
523 여름에 그런 일이 한 번 있어났었습니다. 유리를 갈아끼우는 데 그때 돈으로 백5십
524 프랑이나 들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주택 관리 규정에 그 창문을
525 닫아두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526 그는 자꾸만 주택 관리 규정을 들먹이는 자기 자신이 우스워 보이리라는 생각이
527 들었다. 그리고 그 비둘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는지는 그가 굳이 알고 싶은
528 것도 아니었다. 사실 비둘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하기도 싫었다.
529 따지고 보면 그 끔찍스러운 사건이야 오직 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530 그는 다만 로카르 부인의 성가신 시선에 대해서 느낀 분풀이만 하고 싶었을 뿐, 다른
531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의 첫마디로 이미 표현된 것 같았다.
532 이제는 격분이 다 가셔버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533 "비둘기를 다시 내쫓고, 창문도 닫아놓아야지요."
534 로카르 부인은 이 세상에서 그처럼 쉬운 일이 없고, 그렇게만 하면 다시 모든 것이
535 제대로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나단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는 로카르
536 부인의 갈색 눈동자 속으로 자신이 빠져들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 갈색의
537 끈끈한 늪 속에 하마터면 빠져 죽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져서, 그곳을
538 빠져나오려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다시 되찾아야 될 것 같아서
539 헛기침을 해댔다.
540 "에, 그러니까."
541 그는 말을 시작하고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542 "그러니까, 새똥이 아주 많다는 겁니다. 시푸르뎅뎅한 똥이요. 깃털도 있고요.
543 복도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니까요. 그게 제일 큰 문젭니다."
544 "그거야 그렇겠죠, 노엘 씨"
545 로카르 부인이 말을 이었다.
546 "물론 복도도 깨끗하게 청소해야 되지요. 그렇지만 우선 먼저 누군가가 비둘기를
547 내쫓아야겠네요."
548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며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549 "그래요, 맞아요."하면서도 그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꿍꿍이 속이지? 도대체
550 뭘 바라고 있는 거야? 왜 하필이면 누군가가 비둘기를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지? 혹시
551 날 보고 비둘기를 내쫓으라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차라리 자기가
552 로카르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553 "네, 맞^습^니^다."
554 그가 말을 계속 더듬거렸다.
555 "누군가 누군가가 그걸 내쫓아야지요. 내가 진작부터 그걸 몰아내고
556 싶기는 하였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바쁘거든요. 보시다시피 오늘 세탁소에
557 빨래를 맡겨야 하고, 그런 다음 직장으로 가야 하거든요. 몹시 바쁘지요, 부인. 그래서
558 그 비둘기를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는 단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부인한테 일러줄
559 생각이었지요. 특히 그 똥들 때문에요. 비둘기 오물이 복도를 온통 더럽혀놓은 것이
560 제일 큰 문제고, 또 그것은 주택 관리 규정에도 어긋나는 거니까요. 주택 관리 규정에
561 보면 복도나 층계나 화장실은 언제나 깨끗해야 된다고 적혀 있거든요."
562 그는 자기가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말을 얼버무렸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해 낼 수
563 없었다. 거짓말이 그에게는 명백하게 드러나 보였고, 또 그것은 그가 감추고자 했던
564 유일한 진실이기도 했다. 그가 절대로, 결코 비둘기를 몰아낼 수 없으며, 그 반대로
565 오히려 비둘기가 오래 전에 그를 내쫓았다는 것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566 있었다. 설령 로카르 부인이 그의 말에서 그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567 그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어내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얼굴이 후끈
568 달아오르고, 피가 거꾸로 솟구치며, 양볼이 수치심으로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569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570 로카르 부인은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혹시 정말로 아무것도
571 눈치채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572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노엘 씨. 틈나는 대로 내가 처리할께요."
573 그 말만 해놓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신발을 질질 끌며 조나단의 주의를 빙 돌아서
574 숙소 옆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쑥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575 조나단은 그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그를 비둘기로부터 구출해 줄 수
576 있을 거라는 한가닥 희망마저, 화장실로 훌쩍 들어가버린 로카르 부인의 무심한
577 뒷모습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가 아무것도 처리하지
578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았다.
579 (아무 것도 안할 거야. 꼭 그 여자가 그 일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집
580 안을 관리하는 사람일 뿐인데. 층계와 복도에 비질을 하고, 1주일에 한 번씩 공동
581 변소를 청소하라는 책임은 있지만 비둘기를 내쫓을 의무는 없잖아? 오후에 술을
582 마시면 아무리 늦어도 그때쯤엔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 거야. 지금, 바로 이
583 순간에 잊지 않았다면.)
584 조나단은 지점장 대리 빌망 씨와 출납 계원 로크 부인이 출근하기 정확히 5분 전인
585 8시 15분 정각에 은행에 도착했다. 그들은 함께 은행 문을 열었다. 조나단은 겉에
586 있는 셔터를 올렸고, 로크 부인은 바깥쪽의 방탄 유리문을 열었으며, 빌망 씨는 안쪽의
587 방탄 유리문을 열었다. 그런 다음 조나단은 빌망 씨와 함께 열쇠로 비상 경보기를
588 풀었고, 로크 부인과는 지하로 통하는 비상문의 이중 자물쇠를 열었다. 비상문 안으로
589 로크 부인과 빌망 씨가 함께 들어가서 서로 맞물려야 열리게 되어 있는 열쇠를
590 사용하여 금고 문을 여는 동안, 조나단은 가방과 우산과 겨울 외투를 화장실 옆에
591 있는 옷장에 집어넣고, 안쪽 방탄 유리문에 차려 자세로 서서, 안팍 유리문을
592 자동적으로 교대하며 열리게 하는 두 개의 전자식 버튼을 조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593 차츰 오고 있는 직원들을 통과시켰다. 8시 45분에 전 직원이 다 출근해서 각자 자기가
594 맡은 자리인 객장이나, 수납계나, 사무실 책상에서 준비를 갖췄고, 조나단은 정문
595 바깥쪽 대리석 계단 위에 있는 초소로 가려고 은행을 나왔다. 그의 실제적인 업무가
596 이제 시작되는 셈이었다.
597 그의 업무라는 것은 그가 지난 30 년 전부터 아침에는 9시에서부터 오후 1시까지,
598 오후에는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초소에 차려 자세를 하고 서 있거나, 맨 아래
599 계단으로 내려가서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왔다갔다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9시
600 30분경과 4시 30분부터 5시 30분 사이에 지점장 뢰델 씨의 검은색 승용차가
601 들어오거나 나가게 되면 보초를 잠시 중단하곤 했다. 그때는 대리석 계단 위의 초소를
602 벗어나 은행 건물에서부터 약 12 미터 떨어져 있는 대문 쪽으로 달려가, 무거운
603 철제문을 열고, 손끝을 모자챙에 갖다 대는 예우로 인사를 깍듯이 한 다음, 승용차를
604 출입시켜야만 했다. 그 비슷한 경우는 이른 아침 일찍이나 늦은 오후 시간에 '브링크
605 현금 운반 서비스'의 방탄차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차가 와도
606 철제문을 열어주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 되기는 하지만, 그때는
607 손을 쫙 펴고 모자챙에 손끝을 갖다 대는 깍듯한 경례가 아니라, 검지로 모자 끝을 툭
608 쳐 보이며 동료들끼리 나누는 가벼운 인사를 했다. 그것이 그가 하는 업무 내용의
609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똑바로 선채 앞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610 그러다가 때로는 발을 내려다 보거나, 층계에 시선을 박거나,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
611 쪽을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은 계단 제일 아래칸으로 내려가서 일곱 발자국
612 왼쪽으로 걷다가, 다시 일곱 발자국 오른쪽으로 걸어가기도 했고, 아래에서 두 번째
613 계단으로 옮겨 가 거기에 서 있기도 했고, 간혹 가다가 햇빛이 너무 뜨겁게 비췰 때
614 열기 때문에 모자의 땀받이 띠에 땀이 너무 많이 배면 은행 건물 차양의 그림자에
615 가리워져 있는 제일 윗계단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모자를 잠깐
616 벗고, 소매끝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훔쳐내고는 다시 똑바로 서서, 시선을 고정한 채
617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618 그는 자기가 정년 퇴직까지 총 7 만 5 천 시간을 그 세 개의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619 보내게된다는 계산을 해 본 일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파리 전체에서는
620 물론이거니와프랑스 전체에서도,같은 장소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낸
621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5 만 5 천 시간을 이미 그곳에서 보냈으니 벌써
622 그런 사람이 돼 있을 수도 있었다. 경비원으로 정식 고용된 사람이 시 전체로 보아도
623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다른 대부분의 은행들은 경비
624 용역 회사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그곳에서 파견되어 나와 양쪽 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625 찌뿌둥한 인상을 쓰는 시건방진 젊은이들을 문가에 세워두다가, 몇 주일 혹은 몇 달도
626 채 못되어 다시 그런 껄렁한 녀석으로 교채하기 일쑤였다. 소위 업무 수행상의
627 심리학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한다는 거였다. 경비원이 근무를 같은 장소에서 너무
628 오래 계속하다 보면 주의력을 차츰 상실한다는 것이 그 까닭이었다. 주변에서
629 일어나는 사건에 둔감해진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점점 게을러지고, 타성에 젖게되어
630 직책상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로 변하게 된다는 거였다.
631 그가 보기에 그것은 다 쓸데없는 헛소리였다! 그런거라면 조나단이 그 따위
632 이론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경비원의 주의력은 불과 몇 시간만 지나면
633 다 상실되어 버린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자신도 주변의 환경과 은행을 오고
634 가는 수백명의 인간들을 이미 근무 첫날부터 별로 의식하지 못했다. 은행털이범이
635 일반 손님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따로 각별한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636 그리고 설령 강도를 발견하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고 하더라도강도가 은행
637 경비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작이 대단히 민첩하기 때문에,경비원이
638 권총을 뽑아 안전핀을 열기도 전에 총에 맞아 죽을 것이 너무나도 뻔했다.
639 마치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장하고 있는 책에서 스핑크스에 관한 것을
640 언젠가 한 번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스핑크스와 같다는 생각이었다. 뭔가
641 행동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고, 다만 서 있음으로 해서 역할을 다 하는
642 의미에서 그랬다. 그것만이 강도짓을 하려고 음모하는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643 도구였다.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라고 스핑크스가 도굴범에게 말할 것 같았다.
644 '내가 너를 막을 수는 없지만, 넌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네가 만약 그런
645 무엄한 짓을 한다면, 신의 복수와 파라오의 혼령이 네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반면
646 경비원은 이렇게 말해야 될 것 같았다. '반드시 나를 통과해야만 한다. 난 너를 막을
647 수는 없지만, 네가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넌 나를 총으로 쏴야만 할테고, 법정의
648 복수는 살인에 대한 유죄 선고로 네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649 물론 조나단은 스핑크스가 경비원보다 더 위협적인 구속력을 갖고 있다는 것쯤은
650 알고 있었다. 신이 복수할 것이라는 말을 경비원이 사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651 그리고 설령 도굴범이 경고에 개의치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스핑크스에게는
652 아무런 위험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엇다. 현무암의 커다란 바위
653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고, 금속으로 주조되어 있거나, 단단하게 벽돌로 쌓여 있으므로
654 도굴범에게 강도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이 5천 년은 더 버틸 수 있기
655 때문이다. 그런 반면 경비원은 은행 강도를 당하는 날엔 불과 5초 만에 목숨을
656 잃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나단은 스핑크스와 경비원이 서로
657 권위를 어떤 도구로 나타내지 않고, 상징적인 의미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일맥
658 상통하다고 느꼈다. 그로 하여금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만드는 그런 상징적인 권위에
659 대한 자각만이 어떤 주의 집중력이나, 무기나, 방탄 유리보다도 더한 힘과 인내를
660 부여해 주었고, 그것만으로 조나단 노엘은 무려 30 년도 넘는 시간을 은행 앞 대리석
661 계단 위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좌절감도 없고, 추호의 불만도 없고, 오늘 그
662 순간까지 찌뿌둥한 얼굴 한 번 하지도 않고 버틸 수 있었다.
663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오늘만큼은 조나단도 스핑크스적인 평화를 얻는 일이
664 결코 쉽지 않았다. 채 몇 분이 흐르기도 전에 발바닥에 몸무게가 다 쏠리는 듯 묵직한
665 압박감이 느껴졌고, 몸무게를 한쪽 발에 실었다가 다시 다른 발로 바꾸는 일을
666 반복하다가 약간 비틀거리는 바람에 이제까지 늘 무게 중심을 반듯하게 세워왔던
667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옆으로 잔 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그리고 갑자기 허벅지와
668 옆구리와 목덜미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한참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겨울에 가끔
669 그랬던 것처럼 말라서 까칠까칠해진 듯이 이마가 근질근질거렸다. 그러나 실제 날씨는
670 몸시 더웠다. 9시 15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기 어려울 만큼 후끈거렸고, 이마는
671 벌써 땀에 흠뻑 젖었다. 보통 때라면 11시 반쯤이나 돼야 그렇게 되었을텐데
672 팔, 가슴, 등, 허리, 다리 아랫부분, 살갗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마구 가려웠고 그냥
673 사정없이 박박 긁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차마 경비원으로서 공공 장소에서 할
674 만한 일은 못 되었다. 그래서 그는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가슴
675 쪽으로 확 뿜어도 보고, 등을 굽혔다가 다시 펴기도 해보고, 어깨를 들었다 놓았다도
676 해보면서 그런 식으로 입고 있는 옷을 들썩거려 옷으로 몸을 문질렀다. 그렇게 이상한
677 몸짓으로 몸을 들썩거리는 동안 조금씩 옆걸음을 치며 잡으려고 했던 몸무게 중심을
678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그는 뢰델 씨의 승용차가 들어오는 9시
679 반까지는 한자리에 고정한 채 서서 경비를 보던 습관을 무시하고 하는 수 없이 일곱
680 발자국씩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일곱 발자국 오른쪽으로 가며 앞뒤로 오가는 순찰
681 경비 자세로 바꾸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시선을 두 번째 계단의 가장자리에
682 붙들어매고, 수레바퀴처럼 궤도 위의 일정한 구간을 왔다갔다함으로써, 계단 디딤돌의
683 모서리에 잡히는 단순하고 매번 똑같은 형상을 정확히 볼 수 있도록 하여, 몸이
684 무겁게 느껴지는 것과 살갗이 가려운 것과 육신과 정신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자신의
685 처지를 잊으려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그가 고대해 마지않는 스핑크스적 관용을
686 마음속에 불러들이려는 노력이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687 수레바퀴는 자꾸만 다시 궤도를 벗어났다. 눈을 깜박거릴 때마다 그 괘씸한 모서리는
688 시야에서 사라졌고, 다른 것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에 나뒹구는 찢겨진
689 신문조각이라든가, 파란색 양말을 신은 발이라든가, 여자들의 뒷모습이라든가, 빵을 사
690 넣은 시장 바구니라든가, 바깥 방탄 유리문의 손잡이라든가, 길 건너 까페의 불이
691 번쩍거리는 빨간색 마름모꼴 담배 판매대라든가, 자전거라든가, 밀짚 모자라든가,
692 사람들의 얼굴이라든가 어떤 곳을 보더라도 그가 방향 감각을 잡을 수 있도록
693 시선을 고정시킬 수 있을 만한 마땅한 새 볼거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른쪽에 보이는
694 밀짚 모자에 눈의 초점을 맞추자마자, 버스가 지나가며 그의 눈길을 왼쪽 길을 따라
695 내려가도록 만들었고, 그곳에서 몇 미터 아래에 있는 흰색 스포츠카를 바라보려고
696 하면, 그것이 다시 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그의 시선을 몰았으며, 그 사이에 밀짚
697 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곤 하였다. 지나가는 수많은 군중의 무리와 수많은
698 모자들 사이에서 그것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려보다가 전혀 다른 모자에 매달려 있는
699 장미를 쳐다보게 되고, 그것에서 눈을 떼어 마침내 다시 계단의 디딤돌 모서리에
700 시선을 떨구어도 보았지만, 마음의 안정은 여전히 찾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이 점에서
701 저 점으로, 이 얼룩에서 저 얼룩으로, 이 선에서 저 선으로 마구 헤맬 뿐이었다.
702 오늘은 마치 가장 뜨거운 7월 오후에나 느껴볼 수 있음직한 더위로 대기가 아른거리는
703 것 같았다.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시야를 가렸다. 집과 지붕의 선과 용마루의 윤곽들이
704 눈이 부시도록 날카롭게 잡혀오면서도, 동시에 끄트머리가 풀어헤쳐진 것처럼
705 희끄무레하게 보이기도 했다. 하수구 뚜껑 가장자리와 마름모꼴의 보도 블록 사이의
706 흠이전에는 자로 그은 듯 반듯해 보였는데,번득거리며 곡선으로
707 너울거렸다. 그리고 오늘따라 여자들은 모두들 눈에 확 띄는 진한 색깔의 옷을 입고
708 있는 듯 열기를 내뿜으며 지나갔고, 그것은 그의 눈길을 꼭 붙들어주지도 않았다.
709 윤곽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또렷하게 주시할 수 있는 것도
710 없었다. 모든 것이 흔들흔들거렸다.
711 시력 때문일 거라고 조나단은 생각했다. 밤 사이에 근시안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712 안경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주 어렸을 때 안경을 써본 적이 있었다. 도수가 아주
713 높았던 것은 아니고, 좌우가 마이너스 0.75 디옵터였다. 이제 나이가 이렇게 많이 든
714 마당에 시력이 다시 근시안이 되었다는 것이 이상했다. 나이가 들면 근시안적인
715 증상은 사라지고, 오히려 원시안이 된다는 것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에게
716 지금 나타나는 증상은 전형적인 근시가 아니라서 안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인지도
717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내장이라든가, 녹내장이라든가, 망막 박리라든가,
718 안암이라든가, 뇌에 종양이 있어서 그것이 시신경을 자극한다든가.
719 그런 몹쓸 사념에 너무나 몰두해 있던 나머지,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여러 번
720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듣지 못했다. 겨우 너더댓 번째가 되어서야경음기가
721 한참 울고 있을 때,비로소 그것을 듣고, 그에 따른 반응으로 고개를 들었다.
722 뢰델 씨의 승용차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 번 경적 소리가
723 울렸고, 한참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대는 것이 보였다. 정문 앞에 뢰델
724 씨의 차가 멈춰서 있다니! 그것이 안으로 들어오려는 순간을 놓쳤던 적이 아직까지 한
725 번도 없었다. 평상시 그는 그쪽을 쳐다볼 필요도 없었고, 자동차의 엔진소리를 알고
726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오고 있음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잠자다가도 뢰델 씨의
727 승용차가 다가오면 개처럼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728 뛰었다기 보다는너무나 서두르다가 넘어질 뻔하면서,정신없이 돌진해
729 가서 철제문을 따고, 옆으로 민 다음, 경례를 한 채 그것을 통과시켰다. 가슴이 마구
730 방망이질을 쳐댔고, 모자챙에 붙인 손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731 대문을 닫고, 다시 현관문 쪽으로 되돌아 왔을 때,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732 (뢰델 씨의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그는 자기 자신조차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733 듯이 괴로움으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734 (뢰델 씨의 차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어 못 본거야. 끝장난 거야. 의무를
735 내팽개친 거야. 넌 눈만 멀은 것이 아니야. 귀도 먹었어. 넌 이제 형편없이
736 늙어버렸어. 더 이상 경비원 노릇도 할 수가 없어.)
737 대리석 제일 아래 계단이 있는 곳까지 가서 그것을 간신히 오른 후, 다시 자세를
738 잡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그는 곧 감지할 수 있었다.
739 어깨를 반듯하게 추스릴 수가 없었고, 팔은 바지 옆 봉제선 근처에서 흔들거렸다. 그런
740 자기 자신의 몰골이 우스꽝스러우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741 하염없는 시름에 빠진 채 그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 차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길 건너
742 까페를 쳐다보았다. 눈 앞이 아른거리던 현상은 이제 나타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743 것들이 다시 반듯하게 일직선을 이뤘고, 세상은 또렷하게 보였다. 자동차 소리,
744 여자들의 구두굽 소리가 이제 다 들렸다. 시력이나 청력 그 어떤 것도 조금치도
745 손상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비오듯 쏟아져내렸다. 그는
746 기력이 없었다. 몸을 돌려 둘째와 셋째 계단을 오른 다음 바깥 방탄 유리문 곁의 기둥
747 앞 그늘에 바짝 붙어섰다. 그는 뒷짐을 지고, 기둥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런 다음 30
748 년간의 직장 생활중 처음으로 손과 기둥에 몸을 의지하고 슬그머니 등을 기댔다. 잠깐
749 눈을 감았다. 너무나도 자신이 부끄러웠다.
750 점심 시간에 그는 가방과 외투와 우산을 옷장에서 갖고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성
751 플라시드 가로 가서 주로 학생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묵는 작은 호텔로 갔다. 제일
752 값이 싼 방을 요구했고, 하룻밤에 55 프랑이라는 방을 미리 보지도 않고 돈을 지불한
753 다음 짐을 프런트 데스크에 맡겼다. 가두 판매대에서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과
754 우유를 사서 봉 마르셰 백화점 앞의 작은 광장에 있는 부시코 공원으로 갔다. 그는
755 그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756 그의 벤치로부터 두 번째 떨어진 벤치에 거지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거지는
757 백포도주병을 허벅지 사이에 끼운 채 바케트 빵 반쪽을 들고 있었으며, 그의 바로
758 옆에는 훈제된 정어리 봉지가 있었다. 거지는 정어리를 한 마리씩 꼬리를 붙들고
759 꺼내어, 입으로 머리를 싹둑 잘라 뱉어내고는 나머지를 한 입에 다 구겨넣었다. 그런
760 다음 빵을 한 입 베어먹고, 술병을 들어 크게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단히 만족스러운
761 트림을 했다. 조나단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겨울이면 그는 언제나 백화점의
762 창고로 통하는 길목이나, 백화점의 지하 보일러실 위쪽 창살에 앉아 있곤 했다.
763 여름에는 세브르 가의 상점들 앞이나, 외국인 선교단 건물 앞이나, 우체국 옆에 앉아
764 있곤 했다. 그 근방에서 그도 조나단처럼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765 조나단은 30 년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에 찬 질투심이 기억났다. 그런
766 종류의 사람들이 사는 인생살이의 태평스러움에 대한 노여운 질투심이었다. 날이면
767 날마다 조나단은 9시 정각에 근무를 시작해야만 했지만, 그 거지는 10시나 11시에
768 모습을 나타내곤 했었다. 조나단이 빳빳한 자세로 서 있어야 되는 반면, 그는 골판지
769 가장자리에 방자하게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곤 했었다. 조나단이 날이 가고, 달이
770 가고, 해가 가도록 목숨까지 바치면서 은행을 지킴으로써 생활비를 피땀 흘려
771 벌어들인 반면, 그 작자는 뭇사람들의 동정심과 적선에 빌붙어서 다른 아무 짓도 하지
772 않았다. 그래도 거지는 한번도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 일이 없었고, 모자가 텅 비어
773 있어도 마찬가지였으며, 무슨 고통을 받고 있다든가, 두려워한다든가, 지겨워하는
774 구석도 전혀 보이지 않았었다. 언제나 그에게서는 자신만만함과 자기 만족이
775 솟구쳐올랐고, 그것은 자유로움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버젓이 나타나 남들의 눈길을
776 빼앗곤 하였다.
777 옛날에 딱 한 번, 60 년대 중반의 어느 가을 날에 조나단이 뒤팽 가에 있는
778 우체국을 막 들어가려고 하다가 골판지 가장자리에 비닐 봉지와 동전을 몇 개
779 받아놓은 그 유명한 모자 옆에 세워 둔 술병을 하마터면 넘어뜨릴 뻔한 일이 있었다.
780 그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잠시 거지를 찾아보았었다. 그 자가 보고 싶어서 그랬던
781 것이 아니라, 술병과 비닐 봉지와 골판지가 있는 자리의 중앙에 그가 빠지고 없었기
782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길 건너편 주차된 차들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783 거지가 보였고, 급한 용변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지는 바지를
784 무릎까지 끌어내린 채 하수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조나단 쪽을 향하고 있던
785 엉덩이는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고,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의
786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밀가루처럼 허연 엉덩이에는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고,
787 붉으스레한 부스럼 자국이 나 있었다. 그것은 살가죽이 벗겨져서 마치 몸져누워
788 지내는 노인네의 궁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거지의 나이는 그때 조나단의
789 나이보다 훨씬 많지도 않았고, 서른이나, 기껏 많아 보았자 서른다섯밖에 안 됐었다.
790 어쨌든 그런 지저분한 엉덩이에서 갈색 죽 같은 물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많이
791 쏟아져 나오더니, 이내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면서 신발 주위에서 물결쳤고, 밑으로
792 힘차게 떨어지던 파편들은 양말과 종아리와 바지와 셔츠 그리고 모든 것들은 더럽히며
793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794 너무 비참했고, 메스껍고,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기 때문에 조나단은 아직도 그때를
795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런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고 난 다음 그는 우체국 안으로
796 도망치듯 들어가 전기 요금을 냈고,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우체국에서 시간을 더
797 보내려는 생각에 우표도 샀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는 우체국을 나설 때 거지의
798 모습과 맞닥뜨리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막상 밖으로 나올 때는 눈을 질끈
799 감았다가 땅바닥만 쳐다보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길 건너편을 보지않으려고 뒤팽 가가
800 있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었다. 그리고 뭐 잃어버린 것도 없으면서 술병과 골판지와
801 모자가 있는 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굳이 길을 그대로 따라가 세르슈 미디 가와
802 라스파유 가를 빙 도는 우회로를 선택했었고, 마침내 플랑슈 가에 있던 그의 안전한
803 도피처인 방으로 갔었다.
804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부터 조나단이 거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는 부러움이 흔적도
805 없이 사라졌다. 물론 문이나 가끔씩 열어주거나, 지점장의 차를 향해 경례를 붙이는 등
806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휴가도 조금 받고,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으면서도, 월급의
807 대부분은 세금이니, 임대료니, 사회 보장 보험 분담금 등으로 흔적도 없이 뺏기며
808 인생의 3분의 1을 은행 앞에 서서 허송하는 일로 지내는 노릇이 도대체 의미가 있는
809 일인지에 대한 회의를 종종 품기도 했었다. 그런 따위들이 의미가 있는
810 것인지에 대한 대답은 뒤펭 가에서 보았던 끔찍스러운 모습으로 그에게 만큼은
811 확실하게 쥐어졌다.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런 노릇이라도 하고 있었기
812 때문에 적어도 공공 장소에서 자기의 엉덩이를 노출시키지 않아도 되었고, 그렇게
813 용변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만 놓고 보아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로 생각되었던
814 것이다. 남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까고, 용변을 볼 수밖에 없는 사정보다
815 더 비참한 일이 그의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밑으로 끌어내린
816 바지춤과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세와 어쩔 수 없이 망칙하게 벗고 있는 것보다 더
817 굴욕적인 것은 정말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 부득이하게 보는 용변을 세상
818 사람들의 이목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밖에 없는 처지보다 더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819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부득이하게 보는 용변! 그 말 자체가 이미 모든 괴로움을 다
820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정으로 볼 일을
821 봐야만 할 때는 다른 사람이 전혀 없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만이 그 일을 대충 할 수
822 있는 거였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만이라도 필요한
823 법이었다. 이를테면 시골에서는 숲으로 들어간다거나, 들판에서 그런 입장이 되면
824 풀숲으로라도 간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밭고랑을 찾아가거나, 혹은 저녁 어스름한
825 어둠이 들 때까지 기다리거나, 정 그것도 아니면 사방 1 킬로미터 내에서는 남의 눈에
826 잘 뜨이지 않는 제방으로라도 찾아가야만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렇다면 도시에서는
827 어떻게 해야 되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도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828 한번도 제대로 어두워지지 않는 도시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시 후미진 곳을
829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호기심 어린 남의 이목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는 곳에서는
830 어떻게 하느냐 말이다. 도시에서는 인간들의 시선을 피하려면 빗장과 열쇠로 잠금
831 장치가 잘 되어 있으며, 칸막이가 된 공간을 사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832 급한 용변을 보기에 최고로 안전한 그런 장소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데서나
833 자유를 즐기지만 사실은 제일 불쌍하고 애처로운 사람이란 생각이 그는 들었다. 돈을
834 얼마 들이지 않고서도 조나단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누더기 같은 바지와
835 남루한 잠바를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는 있었다. 소설 같은 상상력을
836 다 동원한다면 골판지 구석에 구부리고 새우잠을 잔다든가, 자기 자신만의 공간이
837 되어야 할 가정을 어느 구석진 곳이나, 보일러 실 곁이나, 지하철 역의 계단 밑에서
838 간신히 꾸린다고 하더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용변을
839 보고 싶을 때 문 뒤로 슬쩍 사라질 곳이 이렇게 큰 도시에 없다면,비록 복도의
840 공동 변소라고 할지라도,개인적인 용무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벗어날 수
841 있는 그런 중요한 자유를 잃어버린다면 다른 모든 자유가 다 쓸모없는 것이라는
842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기에 그런 인생은 더 이상 의마가 없는 것이었다. 차라리 죽는
843 것이 그보다 나았다.
844 인간적인 자유가 적어도 복도의 공동 변소를 사용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845 것과 그런 필요 불가결한 자유를 자기가 누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마음속
846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이 생각할수록
847 천만다행스러웠다! 그것은 어떤 면으로 보나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 비록 가진 것은
848 없지만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후회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그는
849 은행 문 앞에서 다리에 힘을 더 꽉 주고 서 있게 되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마치
850 금속으로 주조된 동상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그때까지 거지의 마음속에 있으리라고
851 짐작해 왔던 자신만만함과 긍지가 어느새 쇳물처럼 녹아서 그의 몸 속으로 들어와,
852 그의 내부에 철판을 만들어놓은 것 같았고, 또 그것은 그를 그만큼 강하게 만들었다.
853 앞으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그를 흔들리게 할 수 없으며, 그로 하여금 회의를
854 품게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스핑크스적인 평온함을 되찾은 거였다.
855 거지를 보면어쩌다가 그와 맞부딪치거나, 아무데서나 앉아 있는 그를
856 보면,전체적으로 일컬어서 관용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감정, 구역질과 경멸과
857 애처로움이 뒤범벅이 된 미온적인 감정의 혼합체를 느낄 뿐이었다. 거지가 더 이상
858 그를 노엽게 하지도 않았다. 조나단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859 오늘 부시코 공원에 앉아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을 뜯어먹고, 우유를 팩째
860 들고 마시기 전까지만 해도 거지는 그에게 전혀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평상시에 그는
861 점심 시간이면 집으로 갔었다. 불과 5분만 가면 집에 도착했다. 대개 오믈렛, 햄을
862 섞은 달걀 후라이, 치즈 가루를 뿌린 국수, 또는 전날 남아 있던 스프를 데우는 등
863 따뜻한 음식을 직접 만들었고, 거기에 샐러드를 곁들였으며, 커피도 한 잔씩 했다.
864 점심 시간에 공원 벤치에 앉아 빵과 우유를 먹는 일은 참으로 굉장히 오랜만의
865 일이었다. 사실 그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866 그렇지만 오늘은 이미 방 값으로 55 프랑이나 지출해 버린 입장이었다. 그러니
867 식당으로 가서 오믈렛과 샐러드와 맥주를 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낭비 같았다.
868 건너편 벤치에 있는 거지는 식사를 다 마친 모양이었다. 정어리를 다 먹어치운 다음
869 빵과 치즈와 배와 과자도 먹었고, 포도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키고는 속까지 시원할
870 것 같은 트림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잠바를 돌돌 말아 베개를 만들어 그 위에 머리를
871 얹더니 배부르고 게으른 육신을 벤치의 길이대로 쭉 뻗고 오수를 즐길 자세를 취했다.
872 그는 이내 잠이 들었다. 참새들이 팔딱거리며 다가와 빵 부스러기들을 쪼아 먹으며
873 뒤뚱 거렸다. 참새들을 따라 온 몇 마리 비둘기도 그의 벤치 가로 가서 뱉어낸
874 정어리의 머리를 까만 주둥이로 연신 쪼아댔다. 거지는 새들이 그래도 꿈쩍 안 했다.
875 깊게 그리고 아주 평안하게 잠을 잘 뿐이었다.
876 조나단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렇게 그를 쳐다보는 가슴에 이상한 불안감
877 같은 것이 생겨났다. 그 불안감은 과거에 느꼈던 그런 부러움이 아니라 경이감에서
878 비롯된 것이었다. 어떻게 저 사람이 나이 50이 넘도록 살 수 있었는지가 스스로
879 의문스러웠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살아오다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간경화증에
880 시달리다가 목숨을 잃거나, 어쨌든 이미 옛날에 죽었어야 마땅했다. 그 대신 버젓이
881 살면서 대단한 식성으로 먹고, 마시고, 당당히 잠자고, 비록 헝겊을 대고 기운
882 바지지만 옷도 입고 있었다. 물론 지금 그가 입고 있는 바지는 옛날 뒤팽 가에서
883 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수선을 하기는 하였어도 그런
884 대로 맵시가 있고 거의 유행에도 맞는 골덴 바지였다. 거기에다가 그의 면잠바를 함께
885 놓고 보면 세상에 썩 잘 어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어떤 확고한 인상을 주는
886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에 비하면 조나단은그의 경이감은 차츰
887 머리를 어지럽히는 신경질로 변해갔다,평생토록 착실했고, 단정했고, 욕심도 안
888 냈고, 거의 금욕주의자에 가까웠고, 깨끗했고, 언제나 시간을 잘 지켰고, 복종했고,
889 신뢰를 쌓았고, 예의도 잘 지키며 살아왔건만 그리고 단 한푼이라도 스스로
890 일해서 벌었고, 전기세나 임대료나 관리인에게 주는 성탄절 보너스도 언제나 제 때
891 꼬박꼬박 현금으로 지불했으며 빚이라고는 진 적이 없고, 남에게 폐를 끼친
892 일도 없고, 병에 걸렸던 적도 없고, 사회 보장 보험금에 신세를 진 적도 없고
893 언제 그 누구에게라도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고, 일생동안 마음이 평안한 작은
894 공간을 갖는 것 말고는 절대로, 결코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았건만 쉰세
895 번째 되는 해에 어쩌다 큰 위기를 겪게 되어, 주도 면밀하게 세워두었던 인생의
896 계획을 몽땅 수포로 돌려버리고,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 되었으며, 당혹스러움과
897 두려움으로 기껏 건포도가 든 달팽이 모양의 빵 따위나 뜯어 먹고 있는 것이었다.
898 그것은 분명히 두려움이었다! 잠들어 있는 거지를 보고 있던 그의 몸이 부들부들
899 떨리고 무서웠다. 자기도 벤치에 누워 있는 그 폐인처럼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900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다. 빈털털이가 되고, 저런 밑바닥 인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901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확실해 보이는
902 것들이 완전히 부서지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가 궁금해졌다. (뢰델
903 씨의 승용차가 오는 것을 못 봤지.)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까지 한 번도
904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오늘 일어났어. 승용차를 못
905 본거야. 오늘은 자동차에 주의를 하지 못했으니, 내일은 근무중 다른 것들도 다
906 망각하게 되겠지. 철제문을 여는 열쇠를 잃어버린다거나 해서 넌 다음 달에 문책성
907 해고를 당하고 말거야. 그러면 한번 실패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
908 새 직장도 못 구할 거야. 실업 수당으로는 입에 풀칠도 못 할 테고, 네 방은
909 그때쯤이면 비둘기가 한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더럽히고 엉망진창을 만들어놓았을
910 테니 넌 그 방을 뺏겨버리고 말겠지. 호텔 숙박료는 기하학적인 숫자로 불어날테고, 넌
911 걱정 때문에 술을 마시고, 점점 더 많이 마시게 되고, 저금한 돈까지 다 술로
912 탕진하고, 술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병에 걸리고, 방탕해지고, 온몸에 이가 들끓고,
913 타락하고,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마침내는 제일 값싼 여관에서조차 내쫓김을 당하는
914 신세가 되겠지. 그러면 넌 길로 나앉게 되어 빈털털이가 되고, 거리에서 잠도 자고,
915 똥도 싸면서 완전히 끝장을 보게 될 거야. 조나단, 넌 올해 말이 되기도 전에 다
916 떨어진 누더기 옷을 걸치고 공원 벤치에 누워 있게 될 거야. 저기 저자처럼 말이야.
917 그러면 저 폐인이 된 자가 너의 형뻘이 되는 거야!)
918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는 경고하고 있는 듯한 잠자는 남자의 모습에서 시선을
919 돌리고, 마지막 남은 달팽이빵 조각을 한 입에 꿀꺽 삼켰다. 그 작은 조각이 위까지
920 내려가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달팽이가 기는 것처럼 천천히 식도를 따라
921 내려가다가, 어떤 때는 그냥 멈춰 있는 것 같기도 하였고, 마치 가슴패기에 못이라도
922 박는 것처럼 압박감에 통증이 몰렸다. 그 고약스러운 것 때문에 질식해 버릴 것
923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것이 다시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더니 마침내 밑으로
924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그와 함께 격심한 통증도 사라졌다. 조나단은 숨을 깊게
925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926 30분이나 남아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 정도면
927 충분했다. 그곳이 그에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다. 각별히 주의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928 바지 무릎 부분에 떨어져 있던 빵부스러기들을 손등으로 털어내고, 바지 주름도 다시
929 잡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지가 있는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갔다.
930 세브르 가까지 다 갔는데 공원 벤치에 빈 우유 팩을 두고왔다는 생각이 머리에
931 갑자기 떠올랐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벤치에 쓰레기를 그대로 두고 간다거나,
932 쓰레기를 따로 모아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어디를 가나 설치해 놓은 쓰레기통에
933 버리지 않고, 그냥 길바닥에 버리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에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934 그는 이제까지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공원 벤치 등에 두고 그대로 온 적이
935 한번도 없었으며, 게으르거나 망각 때문에라도 그런 짓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936 시시한 일은 그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필이면
937 많은 일이 잘되지 않은 불안한, 바로 오늘 같은 날에 그런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938 않았다. 어차피 일은 꼬였고, 이미 바보 같은 행동도 저질렀고, 자기 일에 책임질
939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도 했고, 또 그런 자기 자신을 비사회적인 인간에 가깝다고
940 느끼기까지 하는 처지였다뢰델 씨의 자동차를 보지 못했다든가, 점심으로 공원
941 벤치에 앉아서 달팽이 모양의 빵이나 먹는다든가 하는 따위들이 바로 그런
942 짓들이었다!,만약 지금 조심하지 않는다면, 우유 팩을 그냥 놓고 오는 등의 아주
943 사소해 보이는 일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즉시 균형을
944 잃어버리고 처참하게 종말을 맞게 되는 처지를 어떤 것으로라도 막을 수 없을 것만
945 같았다.
946 그는 결국 방향을 바꿔 공원 쪽으로 향했다. 멀리에서도 그가 앉아 있었던 벤치가
947 비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암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벤치
948 등받이 널빤지 사이로 하얀색 우유 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여간 다행스럽지가
949 않았다. 그의 무심함이 아직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제
950 그 고약스러운 실수를 감쪽 같이 없애버리면 될 것 같았다. 벤치의 뒤로 다가가서
951 그는 허리를 잔뜩 굽히며 왼손으로 우유 팩을 잡고, 대충 거기쯤에 가까운 쓰레기통이
952 있을 거란 생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휙 돌리는 순간비스듬히 아래쪽에서 뭔가
953 바지를 세차게 잡아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하였지만, 워낙에 급작스럽게
954 생겨난 일이고, 이미 그 반대의 방향으로 몸을 똑바로 세우려는 동작중에 일어난
955 일이라서 그로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그때 크게 '찍'
956 하는 아주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렸고, 바깥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란 것을 쉽게
957 짐작할 수 있는 한 줄기 바람이 왼쪽 넓적다리 살갗 위로 서늘하게 불었다. 잠깐 동안
958 그는 너무나 기겁을 한 나머지 차마 그쪽을 내려다보지도 못했다. '찍' 하는 소리가
959 아직도 그의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고, 그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기 때문에 단순히
960 바지만 찢겨진 것이 아니라, 지진으로 땅이 갈라진 것처럼 그의 속살이 찢겨졌가나,
961 벤치가 부서졌거나, 공원이 쫙 갈라져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끔찍스러운 '찍'
962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나게 만든 장본인인 조나단을 험상궂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을
963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들은 뜨개질을
964 계속하였고, 할아버지들은 신문을 계속 읽었으며, 몇 명 안 되는 아이들은 여전히
965 놀이터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놀았고, 거지는 잠자고 있었다. 조나단은 아주 천천히
966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찢겨진 길이가 약 12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것은 벤치에
967 뾰쪽하게 나와 있는 나사에 몸을 돌리면서 걸렸을 왼쪽 바지 주머니 끝에서부터
968 시작하여 넓적다리를 죽 타고 내려가 있었다. 그것도 바느질 선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
969 아니라 멋진 게버딘 근무복의 한복판을 가로 지르다가, 바지 주름 쪽을 향해 엄지
970 손가락 두 개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넓이로 직각을 이루며 찢어져 있었다.
971 그래서 그냥 단순히 옷감이 찢겨진 것이 아니라 삼각형의 깃발처럼 펄럭거려 도저히
972 간과할 수 없는 구멍을 만들어놓은 있었다.
973 조나단은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아드레날린이라는 흥분제가 부신
974 수질로부터 분비되어, 육신의 극히 위험한 위기와 정신적인 압박감이 닥쳤을 때 생과
975 사를 가름하는 결투나 도피용으로 저장해 두던 몸 속의 마지막 저력을 움직이게 하기
976 위해서 피 속으로 몰려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바지만
977 찢겨진 것이 아니라 속살이 12센티미터나 상처를 입어서 그곳에서 피가 철철
978 흘러넘치는 것 같았고, 이제까지 내부적으로 다져놓은 순환의 틀 속에 잘 굴러갔던
979 인생이 그 상처 때문에 끝을 보게 되어 미처 손볼 겨를도 없이 마감되는 듯하였다.
980 그러나 그 아드레날린이라는 것이 피를 흘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를 기적적으로
981 소생시켰다. 심장은 힘차게 뛰었고, 용기는 치솟았으며, 그의 머리는 아주 맑아져서
982 오직 한 가지 것에만 신경을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983 (즉시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984 그렇게 그는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985 (이 구멍을 막을 수 있도록 지금 즉시 뭔가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면, 너는 파멸하고
986 만다!)
987 과연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에 대해 자문하는 그에게 해답도 금새 주어졌다. 그
988 환상의 물질 아드레날린은 그렇게 빨리 효과를 냈고, 두려움은 총명함과 실행에 옮길
989 수 있는 힘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단숨에 그는 그때까지 왼쪽 손에 들고 있던 우유
990 팩을 콱 구겨서 잔디밭이든 모랫길이든 상관도 안하고 아무 곳으로나 휙 집어던졌다.
991 이제 아무것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넓적다리에 난 구멍을 가리고 정신없이 뛰기
992 시작했다. 뛰면서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왼쪽 발은 가능한 뻣뻣하게 하였고,
993 오른손은 마구 휘저으면서 다리를 저는 사람처럼 절뚝거리며 공원을 빠져나와 세브르
994 가로 갔다. 이제 시간은 30분도 채 남지 않았다.
995 바크 가 모퉁이에 있는 봉 마르셰 백화점 식료품부의 한 구석에는 여자 재단사가 한
996 명 있었다. 그가 그 여자를 본 것은 며칠 전이었다. 출입구 근처 바로 앞쪽, 사람들이
997 장바구니를 두는 곳이었다. 재봉틀 옆에 팻말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그는 그 내용을
998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잔느 토펠 수선 ,36^ 성심 성의껏 신속하게 옷
999 모양을 바꿔주거나 수선해 줌.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반드시 그 여자가
1000 그를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 가게도 점심 시간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1001 아니, 점심 시간이라면 오늘 일이 너무 많이 꼬이게 되므로, 그 여자는 점심 시간에
1002 쉬지 말아야만 했다. 하루에 일이 그렇게 많이 꼬이는 것은 도저히 참아낼 수가
1003 없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안 됐다. 이처럼 딱한 처지를 당했는데 그런 일이
1004 있어서는 결코 안 됐다. 진실로 곤궁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행운이 찾아와 남의
1005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토펠 부인이 반드시
1006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를 도와주리라고 생각되었다.
1007 토펠 부인은 자리에 있었다! 그는 식료품부를 들어서자마자 재봉틀 앞에 앉아서
1008 바느질을 하고 있는 그 여자를 볼 수 있었다. 토펠 부인은 정말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
1009 같았다. 점심 시간조차 성심 성의껏 신속하게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그
1010 여자가 있는 쪽으로 쫓아가서 재봉틀 옆에 선 다음 넓적다리에 있던 손을 떼고 손목
1011 시계를 얼른 훔쳐 보았다. 시계는 2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인기척을 냈다.
1012 "부인!"
1013 토펠 부인은 빨간색 치마에 주름 잡는 일을 마치고 재봉틀을 끈 다음 옷감을 꺼내
1014 실을 끊으려고 바늘 끝을 이완시켰다. 그리고는 얼굴을 들어 조나단을 쳐다보았다. 그
1015 여자는 테가 굵고 진주빛으로 된 커다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알이 겉으로 많이
1016 불거져 있어서 눈이 커다랗게 보였고, 눈두덩이가 움푹하게 파여 그늘진 웅덩이처럼
1017 보였다. 밤색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매끈하게 흘러내렸고, 입술은 은보라색 화장을 하고
1018 있었다. 나이가 40 대 후반이나 50 대 중반쯤 되었을 것 같았고, 풍기는 인상은
1019 유리알이나 카드를 통해 운명을 읽을 수 있는 아낙네들과 같았다. 사실 미천하여
1020 '부인'이라는 호칭이 썩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보기만 하면 이내 속마음을
1021 털어놓는 그런 여자들의 인상 같았다. 그리고 코 위에 걸쳐져 있던 안경을 조나단을
1022 제대로 보려고 위로 슬쩍 올리던 손가락은 뭉툭하고 소세지처럼 보이기는 하였지만,
1023 그렇게 일을 많이 하는 와중에서도 손톱에 은보라색 매니큐어를 칠해놓아 왠지
1024 친밀감이 느껴지는 소박함을 풍기고 있었다.
1025 "왜 그러세요?"
1026 토펠 부인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 했다.
1027 조나단은 옆으로 비스듬히 서서 바지에 난 구멍을 손으로 가르키고 이렇게 물었다.
1028 "고칠 수 있겠습니까?"
1029 그 물음이 너무 거칠고, 아드레날린 때문에 흥분되어 있는 자신의 상태를 들킬 것
1030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는 될수록 별 것 아니라는 말투로 다시 덧붙였다.
1031 "조금 찢겨져서 구멍이 났어요 재수가 없었죠. 이걸 어떻게 해볼 수
1032 있을까요?"
1033 토펠 부인은 그 큰 눈으로 조나단을 보던 눈길을 떨구고, 넓적다리에 난 구멍을
1034 보더니 그것을 자세히 보려고 몸을 구부렸다. 그러자 밤색의 매끈한 머리카락이
1035 어깨에서부터 뒤통수까지 갈라졌고, 그 사이로 짧고 비곗살로 통통한 흰색 목덜미가
1036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코를 찌를 듯이 진한 화장품 냄새가 솟구쳐올라서, 조나단은
1037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목덜미 근처를 바라보던 시선을 슈퍼마켓 쪽으로
1038 멀리 돌려야만 했다. 잠시 동안 그는 상품 진열대, 냉장고, 치즈 판매대, 소세지 매장,
1039 특별 서비스 코너, 피라미드 형으로 진열된 술병들, 야채 코너 등과 그 사이를 헤매고
1040 있거나, 쇼핑 차를 밀거나, 어린아이 손목을 질질 끌고가는 손님들, 판매원, 창고 직원,
1041 계산대 직원, 또 그들과 함께 허둥지둥대며 소음을 유발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런
1042 그들 곁에 찢겨진 바지를 입고 사방을 샅샅이 쳐다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총체적인
1043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혹시 그 군중의 무리 속에 빌망 씨나 로크
1044 부인이나 심지어 뢰델 씨가 있다가 공공 장소에서 밤색 머리의 여자가 등을 잔뜩
1045 구부리고 조나단의 몸의 은밀한 곳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1046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더군다나 찢겨진 부위의
1047 펄럭거리는 옷감을 이쪽저쪽으로 뒤집어 보고 있는 토펠 부인의 뭉툭한 손가락을
1048 넓적다리 살갗에서 느끼자 몸이 와르르 주저앉아 버릴 것만 같았다.
1049 다행히 토펠 부인이 그 순간 넓적다리가 있는 아래쪽에서 윗몸을 일으키더니 의자에
1050 등을 기대며 앉았고, 사정없이 마구 뿜어대던 화장품 냄새도 가셔서, 조나단은 정신을
1051 어지럽게 만든 그 넓은 매장에서 눈길을 떼고, 크고 안경알이 도톰한 토펠 부인의
1052 친밀감 드는 안경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1053 "어떻겠습니까?"
1054 그렇게 말해놓고 그는 마치 의사 앞에서 무서운 진단이 내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1055 환자처럼 불안해 하며 재차 물었다.
1056 "어떻겠습니까?"
1057 "괜찮겠어요."
1058 토펠 부인이 말했다.
1059 "밑에다 뭐만 대면 되겠어요. 바느질 자국이 조금 남기는 할 거^예요. 그렇게 안
1060 하고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1061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1062 조나단이 말했다.
1063 "바느질 자국 조금 남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렇게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을
1064 누가 세심히 쳐다보겠습니까?"
1065 그렇게 말한 다음 재빨리 시계를 보니 2시 14분이었다.
1066 "그러니까 하실 수 있다는 거죠?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거죠?"
1067 "물론이에요."
1068 그렇게 말하고 토펠 부인은 그것을 자세히 보느라고 밑으로 내려온 안경을 다시
1069 콧등 위로 밀었다.
1070 "아이구, 고맙습니다, 부인."
1071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1072 "정말 고맙습니다. 부인은 저를 지금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서 구출해 주시는
1073 겁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부탁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려우시더라도 제 부탁을
1074 좀 들어주시지요, 시간이 없거든요. 이제 시간이 겨우"
1075 그가 시계를 다시 쳐다보았다.
1076 " 겨우 10분밖에 없답니다. 그러니 지금 즉시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내
1077 말은 지금 당장, 곧바로 말입니다."
1078 질문 가운데는 어차피 묻는 사람조차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묻는
1079 것의 내용에 이미 부정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말을 꺼내자마자
1080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탁도 있다.
1081 조나단은 토펠 부인의 그늘진 커다란 눈을 쳐다보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고,
1082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 그는 이미 그
1083 전에 허둥대며 질문을 늘어놓을 때 다 알고 있었다. 손목 시계를 쳐다본 순간 혈액
1084 속의 아드레날린 수치가 쑥 내려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10분
1085 남았다니!) 그는 이제 막 물에 녹으려는 무른 얼음 덩어리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1086 몸이 뒤뚱하며 기우는 것 같았다. 10분이라니! 세상에 어느 누가 10분 동안에 그렇게
1087 괴상하게 찢겨진 구멍을 때울 수가 있겠는가? 그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도저히
1088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넓적다리에 대고 그대로 꿰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밑에다
1089 뭐든 대야 하니까 그것은 곧 바지를 벗어야 된다는 의미였다. 봉 마르셰 백화점의
1090 식료품부 어디에서 갈아입을 바지를 구한단 말인가? 바지를 벗고 그냥 속옷 차림으로
1091 있는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1092 "지금요?"
1093 토펠 부인이 물었고, 조나단은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잘 알고 있고, 깊이를 알 수
1094 없는 절망감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1095 토펠 부인이 빙그레 웃었다.
1096 "이것 좀 보세요, 아저씨. 여기 보시는 이것들 모두다요."
1097 그렇게 말하면서 부인은 쟈켓과 바지와 블라우스 등의 옷가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는
1098 약 2 미터쯤 되어 보이는 옷걸이를 가르켰다.
1099 "이것들을 내가 지금 당장 다 해야만 한다고요. 하루에 열 시간 동안이나 일하고
1100 있어요."
1101 "네, 그러시겠지요."
1102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1103 "저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부인. 그냥 해본 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인
1104 생각으로는 이 구멍을 기우는데 얼마나 기다리면 되겠습니까?"
1105 토펠 부인은 다시 재봉틀이 있는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빨간색 치마를 다시
1106 추스르며 바늘 끝을 내려 치마에 물렸다.
1107 "다음 주 월요일까지 가져오시면 3주 후에 해놓을 수 있어요."
1108 "3주라고요?"
1109 조나단은 넋이 나간 듯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하였다.
1110 "네, 3주요. 더 빨리는 안 돼요."
1111 그런 다음 부인은 기계를 작동시켰고, 바늘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1112 조나단은 순간적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없는 듯한 착각을 했다. 불과 팔 하나만
1113 뻗으면 닿을 만한 곳의 재봉틀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 토펠 부인, 진주빛 테를 한
1114 안경과 밤색의 머리카락, 바쁘게 움직이는 뭉툭한 손가락, 빨간색 치마의 가장자리에
1115 연신 실을 박아대며 움직이는 바늘을 다 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그 뒤에
1116 분주한 슈퍼마켓의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자기 자신만은
1117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잠깐 동안 자기 스스로를 주변의 한 개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1118 밖에 멀리 떨어져서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보고 있는 것처럼 주변을 지켜보고 있는
1119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전에도 그랬었던 것처럼 다시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렸다. 그는
1120 한 발자국 옆걸음질을 친 다음 방향을 돌려 출구로 빠져나갔다. 걸어가는 동안 정신이
1121 다시 제자리를 찾아왔고, 망원경을 보는 듯한 현상은 눈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마음
1122 속은 그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1123 문방구에서 스카치 테이프를 하나 샀다. 그것을 바지에 붙여서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1124 있는 삼각형의 옷감 깃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펄럭이지 않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고
1125 다시 직장으로 갔다.
1126 오후 내내 그는 걱정과 노여움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행 앞 제일 높은 계단
1127 위에서 기둥에 바짝 붙어있기는 하였지만, 나약함에 굴복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1128 등을 기대지는 않았다. 또 어차피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남의 눈에 잘
1129 띄지 않게 기대려면 뒷짐을 져야만 했는데, 왼손으로 넓적다리의 스카치 테이프를
1130 가려야만 했기 때문에 안 됐다. 그 대신 안정된 자세를 취하려면 싫지만 어쩔 수 없이
1131 건방진 젊은 녀석들이 했던 대로 양다리를 쩍 벌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서자
1132 등이 구부러졌고, 언제나 반듯하게 치켜들고 있던 턱이 머리와 모자랑 같이 어깨
1133 사이로 쑥 들어가는 형상이 되었으며, 그런 자세 때문에 자동적으로 모자챙 아래로
1134 쳐다보는 시선은 험상궂어 보였고,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다른 경비원들을 보면
1135 스스로 경멸했던 무뚝뚝한 표정이 돼버렸다. 그는 갑자기 기형이 된 기분이었고,
1136 경비원의 캐리커처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으며, 자기 스스로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1137 느껴졌다. 그런 그가 한심스러웠다. 혐오스러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타는
1138 증오심으로 껍질을 홀딱 벗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온몸의 살갗이 다시 가렵기
1139 시작하였고, 땀구멍에는 땀이 맺히고 제2의 피부처럼 옷이 몸에 짝 달라붙었기 때문에
1140 옷이 몸을 문지를 수도 없어서 그는 정말로 껍질을 홀라당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1141 살갗과 옷 사이에 공기가 조금 통해서 옷이 붙어있지 않은 곳은 다리 아랫부분이나,
1142 팔뚝이나, 등판의 가운데 고랑 윗부분이었다. 그중에서 등판의 고랑에는 땀이
1143 송글송글 맺혀 땀방울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참아내기 어려울
1144 정도였지만그곳만큼은 절대로 긁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몸
1145 전체로 느끼는 불편함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못할 거면서, 그를 좀 더 확실하게
1146 바보스러운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혹시 약간 도움이 될지도
1147 모를 그 짓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그냥 꾹 참기로 하였다. 오래 참으면
1148 참을수록 그쪽이 더 나았다. 고통을 받음으로써 증오와 분노는 더 부추겨졌고, 그것은
1149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몸 속에 피를 돌게 하면서 땀구멍으로 더 많은 땀을 밀어내는
1150 것으로 그것 나름대로 고통을 배가시켰기 때문에 그의 증오와 분노는 정당화될 수
1151 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흥건히 젖었고, 땀줄기가 턱과 목을 타고 흘러내렸고, 모자의
1152 테두리는 부풀어오른 그의 이마를 아프게 조였다. 그래도 그는 아주 잠시
1153 동안만이라도 절대로 모자를 벗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꽉 닫은 압력솥 뚜껑처럼 쇠로
1154 만든 고리가 되어 관자놀이를 누르며 머리 위에 그대로 얹혀져 있어야만 될 것
1155 같았다. 그러다가 혹시 머리가 터지더라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을 경감시킬 수
1156 있는 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서
1157 있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등이 점점 더 구부러지고 있다는 것과, 어깨와 목과 머리가
1158 더 많이 밑으로 수그러들고 있어서 몸이 땅딸막해지면서 잡종 개 같은 자세로
1159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1160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그가 그렇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1161 없었지만,그의 몸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자기 혐오가 모자챙 밖으로 점점
1162 더 험악하게 노려보던 눈을 통하여 그의 몸 밖으로 빠져나가 완벽한 증오가 되어 바깥
1163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시선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는 모두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의
1164 추악한 찌꺼기로 덮어씌웠다. 세상의 실제 모습이 그의 눈 안으로 담겨지지 않았고,
1165 빛의 흐름이 거꾸로 연결된 듯 두 눈은 마음 속에 일그러진 상들을 밖으로 토해내기
1166 위하여 외부로 통하도록 만들어진 문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때 길 건너편 노천 까페의
1167 웨이터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까페 앞의 인도에서 의자와 탁자 사이를 빈둥거리며
1168 돌아 다니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나이가 새파랗고, 멍청한 웨이터들이었다. 버릇없는
1169 잡담이나 지껄이거나, 히죽거리며 웃거나, 낄낄대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훼방하거나,
1170 아가씨들을 향해 휘바람을 불거나, 가끔씩 주문을 받으면 주방 쪽으로 열린 창문에
1171 대고 '커피 한 잔! 맥주 하나! 레몬수 하나!' 따위나 소리치는 일 말고는 수탉처럼
1172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으로 들어가 편히 쉬든가, 일부러 바쁜 척
1173 하면서 주문된 음식을 곡예를 하듯이 들고 나와 손님들에게 갖다주곤 하였다. 또
1174 주문받은 것을 갖다줄 때는 엉터리 예술가 같은 몸짓으로 찻잔을 나사처럼 빙
1175 돌리다가 탁자에 놓든가, 콜라병을 넓적다리 사이에 끼우고 한 손으로 뚜껑을 딴
1176 다음에 그제서야 그때까지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영수증을 빼내어 재떨이 밑에 끼워
1177 놓는다든가, 그 사이에 다른 손으로는 옆 좌석의 계산을 하곤 하였다. 커피 한 잔에 5
1178 프랑이나 하고, 맥주 작은 것 한 병에 11 프랑이나 하고, 거기에다가 그 잘난
1179 서비스에 대한 봉사료를 15 퍼센트나 얹고, 팁까지 받아 엄청나게 많은 돈을 지갑에
1180 챙겨 넣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한 것처럼 팁을 기대하였다.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1181 팁이나 받아먹는 그들이 굉장히 뻔뻔스러운 작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그것을
1182 주지 않으면 그들 입에서는 '안녕히 가십시오'는 고사하고 '고맙습니다'라는 인사조차
1183 나오지 않았다,팁을 주지 않는 손님은 그런 자들의 눈에는 허깨비 같은
1184 것이어서, 가게를 나설 때 웨이터의 거만한 등짝이나 엉덩짝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1185 그 멍청한 바보들은 돈이 꽉 찬 검은색 지갑을 멋들어져 보인다는 생각으로 마치 살찐
1186 볼기짝처럼 뻔뻔스럽게 내보이며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조나단은 바람이 잘 통할 것
1187 같은 시원한 반소매 셔츠 바람의 그 허풍스러운 작자들을 자기의 독기 어린 시선으로
1188 찔러 죽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예 길 건너편으로 달려가서 그늘진 천막
1189 속에 있는 그들을 귀를 잡고 대로로 끌고 나와 귀싸대기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한
1190 대는 귓바퀴 뒤에, 또 한 대는 볼기짝에 왼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바꿔가며
1191 철썩철썩 갈기고 싶었다.
1192 꼭 그들만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까짓 코흘리개 웨이터의 귀퉁이만
1193 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손님들도 볼기짝을 때려주고 싶었다. 한심한 관광객으로
1194 보이는 손님들은, 바로 코앞에서 어떤 사람은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하고 있는데 여름
1195 남방에 밀짚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어기적거리면서, 값이 터무니없이 비싼 청량
1196 음료나 홀짝대고 있는 작자들이었다. 자동차를 몰고가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1197 공기를 더럽히고, 듣기 거북한 소음이나 유발하고, 지독한 냄새로 찌든 양철통 속에나
1198 들어앉아서 날씨도 화창한 긴 하루를 세브르 가를 난폭하게 왔다갔다하며 질주하는 짓
1199 말고는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원숭이 같은 작자들이었다. '이미 있는 냄새만으로도
1200 충분하지 않단 말인가? 이 거리, 이 도시에서 나는 소음만도 너무 시끄럽지 않다는
1201 건가? 하늘에서 내리쬐는 작열하는 뙤약볕도 부족하다는 건가? 숨쉴 수 있을 만한
1202 것으로는 겨우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은 공기를 엔진 속으로 빨아들여 태워가지고
1203 독성과 매연과 뜨거운 증기로 섞어 멀쩡한 사람의 콧속으로 불어넣어야 속이 시원하단
1204 말인가? 쓰레기 같은 놈들! 범법자들! 그런 놈들은 씨를 말려버려야 해. 총으로 쏴
1205 죽이던가. 한 사람, 한 사람씩 쏜 다음에 다시 전체를 다 쏴버려야 해.'
1206 조나단은 권총을 꺼내 어디로든지 한방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다방의
1207 한가운데를 향하여 쏘든가, 요란하게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나도록 유리창 한
1208 가운데를 향하여 쏘든가, 자동차의 무리 속을 향하여 쏘든가, 길 건너에 있는 보기
1209 싫게 높고 위협적인 큰 건물 가운데 하나를 향하여 쏘든가, 아니면 그냥 허공에 대고
1210 위쪽으로 쏘든가, 혹은 하늘을 향해, 정말 그 뜨겁고 지겹게 짓눌러서 숨막힐 것 같은
1211 비둘기빛 청회색의 하늘을 향해 쏘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1212 부서져서 납처럼 무거운 캡슐 같은 세상을 부서뜨리고, 붕괴하고, 추락하여 저
1213 흉칙스럽고, 지겹고, 시끄럽고, 악취나는 모든 것들을 다 으스러뜨려 묻어버릴 수 있게
1214 하고 싶었다. 바지에 생긴 구멍 때문에 비롯된 조나단의 분노는 결국 온 세상을
1215 산산조각 내고, 재로 만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게 무한하고 무진장해졌다. 그렇지만
1216 그는 천만다행스럽게도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늘로나, 길 건너편의
1217 까페로나, 지나가는 자동차의 무리에 총을 쏘지 않았다. 그대로 선 채 땀을 흘리며
1218 움직이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불타오르게 하였고, 눈을 통하여
1219 뿜어나오게 하였던 바로 그 증오의 힘이 이제는 다시 세상을 등진 듯 그를 완전히
1220 마비시켰다. 손을 무기가 있는 곳까지 움직일 수도 없거니와, 손가락을 방아쇠에 대고
1221 구부릴 수조차 없을 만큼 한 마디 관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는 짓궂게 코
1222 끝에 맺혀 있는 작은 땀방울을 털어내기 위해 머리를 약간 흔들 힘조차도 없었다. 그
1223 힘이 그를 그렇게 돌처럼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를 정말로 스핑크스 같이
1224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였고, 또한 요지부동의 모습으로 바꾸어놓았다. 마치 그것은 철
1225 속에 자석의 힘을 통하게 하거나, 철을 일정하게 흔들거리도록 만드는 전압 같은
1226 것이었고, 혹은 돔 같은 건물의 둥근 천정에 있는 벽돌 하나하나마다 특정한 곳에 꼭
1227 붙어 있게 만드는 강력한 압력 같은 힘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음
1228 속에만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 모든 것의 잠재성은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1229 진정으로 해보고 싶다'라는 가정에 묶여 있을 뿐이고, 조나단은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1230 잡다하게 끔찍한 생각들을 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절대로 할 수
1231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럴 인간이 못 되었다. 정신적인 곤궁함과
1232 혼란스러움과 혹은 순간적인 증오로 범죄를 저지르는 그런 정신 착란자는 아니었다.
1233 그리고 그것은 범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1234 행동으로 실행하거나 혹은 말로도 생각을 내뱉을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1235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참아내는 사람이었다.
1236 오후 다섯 시경에 그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고, 은행
1237 입구의 세 번째 계단에 있는 기둥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만
1238 같았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된 밖으로부터의 태양열과 안으로부터의 뜨거운 분노의
1239 충돌로 온몸이 녹고, 사그라져서 적어도 20 년은 더 늙은 것 같았고, 키도
1240 20센티미터는 줄어든 것 같았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가는 것을 더 이상 느끼지도
1241 못하게 되어서 그는 정말로 몸이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5천년의 세월을 보낸 석제
1242 스핑크스처럼 사그라지고, 피폐해지고, 열에 찌들고, 부서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1243 세월이 얼마 흐르지않아 완전히 말라 비틀어지고, 전소하고, 오그라들고, 부서져서
1244 마치 먼지나 재처럼 가루가 되어, 거기 그가 그렇게 힘겹게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1245 한 무더기 쓰레기로 소복이 떨어져 있다가, 바람이 한 줄기 불어오거나, 청소부가
1246 비질을 하거나, 비라도 오면 그제서야 마침내 그곳에서 멀리 날아가버리게 되리라는
1247 상상이 되었다. 그렇게 그의 인생은 마감될 것 같았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1248 연금을 받고 사는 평범한 노인네가 되어 자기 집의 자기 침대에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1249 거기 그 자리에 한 무더기 쓰레기로 말이다! 그는 이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 주기를
1250 간절히 바랬다. 붕괴의 과정이 좀더 빨리 가속화하여 그만 끝나주었으면 하는
1251 바람이었다. 의식을 잃어버리고 무릎이 꺽이면서 고꾸라져주기를 진실로 바랬다. 그는
1252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며 애를 썼다.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1253 것을 해낼 수 있었다. 원하는 때는 언제라도 울 수 있었다. 숨도 기절할 때까지 안 쉴
1254 수도 있었다. 혹은 심장 박동을 잠시 멈출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것도 할
1255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없었다. 참말이지 주저앉고
1256 싶어도 무릎조차 구부릴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역겨운 것을
1257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1258 그때 뢰델 씨 승용차에서 나는 엔진소리가 나즈막하게 들렸다. 경적 소리가 아니라
1259 방금 전에 시동을 걸고 뒷마당에서 정문 쪽으로 나오려고 할 때 나는 엔진이 돌며
1260 내는 작은 쇳소리였다. 그 작은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귓속을 파고 들어와, 전기가
1261 들어오는 것처럼 그의 몸에 있는 온 신경에 비상을 걸고 있음을 조나단은 몸의 관절이
1262 뚝뚝 꺽이는 것과 척추가 기지개를 펴는 것으로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어떻게
1263 하지도 않았는데 벌리고 서 있던 오른발이 왼발 쪽으로 옮겨가고, 왼발이 구두
1264 뒷꿈치를 중심으로 돌고, 오른쪽 무릎이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구부러지고, 왼쪽도
1265 똑같이하고, 다시 오른쪽발이. 한 발씩, 한 발씩 발을 내딛고, 실제적으로 걷고,
1266 세 개의 층계를 뛰어내려 가고, 벽을 따라가면서 정문 쪽으로 허둥지둥 뛰어가고,
1267 정문을 밀어젖히고, 부동 자세를 취하고, 오른쪽 손을 절도있게 모자챙에 붙이고,
1268 승용차를 통과하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그는 자기 자신의 의지는 전혀
1269 개입시키지 않고 완전히 자동적으로 했다. 그의 자각은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과
1270 뭔가를 했다는 동작만을 인식하는 것 뿐이었다. 행동을 취하면서 조나단이 생각과
1271 함께 했던 유일한 부분은 뢰델 씨의 승용차가 지나간 후 쓰디쓴 분노의 눈길을 그것을
1272 향하여 보낸 것과 한참 동안이나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 전부였다.
1273 그러나 다시 자기 자리로 되돌아왔을 때는 그 마지막 남은 불씨 같은 분노의 불길도
1274 사라져버렸다. 기계적으로 세 개의 계단을 오를 때 증오의 마지막 찌꺼기도 다
1275 말라버렸고, 그 위에 다 올라갔을 때 그는 눈으로 아무런 독기나 분노도 뿜어내지
1276 않았으며, 다만 힘없는 시선을 거리에 떨굴 뿐이었다. 눈이 자기 것으로 생각되지
1277 않았고, 자기가 그 눈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생명이 없는 둥근 유리창을
1278 통해 밖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그랬다. 몸뚱어리도 전부 자기 것이 아닌
1279 것 같았고, 조나단 자신이나 적어도 자기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들은 낯선 사람의
1280 커다란 육신에 쬐끄맣게 찌그러져 붙어 있는 정령처럼 느껴졌다. 자기 힘으로는
1281 조절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로는 방향을 틀 수도 없으며, 필요하다면 저절로
1282 움직이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힘의 지배를 받는 거대한 인간 기계가 있는 누군가의
1283 커다란 몸 속에 갇혀버린 딱한 정령 같았던 것이다. 스핑크스처럼 마음의 평온을 찾은
1284 것이 아니라, 작동이 멈춰졌거나, 줄이 끊겨진 꼭두각시처럼 기둥 앞에 가만히 서서
1285 마지막 남은 10분의 근무 시간을 채웠고, 정각 오후 5시 30분에 빌망 씨가 잠깐 바깥
1286 유리창에 모습을 드러내며 문닫자고 소리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조나단
1287 노엘이라고 불리우는 꼭두각시 인간 기계는 은행 안으로 순순히 들어가, 문의
1288 여닫이를 조절하는 책상으로 가서, 직원들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안쪽과 바깥쪽
1289 유리문을 두 개의 버튼을 누르며 조절하였다. 그런 다음 먼저 로크 부인이 빌망씨와
1290 함께 잠궈둔 금고로 통하는 문을 로크 부인과 함께 잠궜다. 그리고는 빌망 씨와 함께
1291 비상 경보기를 작동시켰고, 전자식 문 개폐기도 끄고, 로크 부인과 빌망 씨와 함께
1292 은행 문을 나섰으며, 빌망 씨가 안쪽 유리문을 열쇠로 채우고, 로크 부인이 바깥
1293 유리문을 잠그고 난 다음 규정대로 셔터를 내리고 잠궜다. 밖으로 나와서 로크 부인과
1294 빌망 씨를 향하여 등을 약간 굽히며 인사를 했고, 그 두 사람에게 좋은 저녁 시간이
1295 되라는 말과 주말을 잘 보내라는 인사도 했으며, 좋은 주말을 보내라는 빌망 씨의
1296 인사와 월요일에 보자는 로크 부인의 말도 감사하게 받았다. 그리고는 그 두 사람이
1297 먼저 몇 발자국을 걸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도 밀려오는 행인들의 물결에
1298 합류하였고, 사람들과 반대 방향 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보행은 마음을 달래줬다.
1299 걷는 것에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발을 하나씩
1300 떼어놓고, 그와 동시에 팔을 리듬에 맞춰 휘젓고, 숨이 약간 가빠오고, 맥박도 조금
1301 긴장하고, 방향을 결정할 때와 중심을 잡는 데 필요한 눈과 귀를 사용하고, 살갗에
1302 스치는 바람의 감각을 느끼고그런 모든 것들이 설령 영혼이 형편없이 위축되고
1303 손상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시 크고 넓게 만들어주어서,마침내 정신과
1304 육체가 모순 없이 서로 조화롭게 되는 일련의 현상들이었다.
1305 그런 현상이 굉장히 큰 육체 인형 속에 파묻혀 있는 정령인 제2의 조나단에게서도
1306 일어났다.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발걸음을 하나씩하나씩 떼어놓을수록 몸이 점점
1307 커져갔고, 내면도 채워져갔으며, 자기 스스로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상태로 급격하게
1308 변화해 가더니 마침내는 조나단 자신과 일체가 되었다. 바크 가의 모퉁이쯤에
1309 다다랐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곧 바로 바크 가를 가로질렀다. (꼭두각시
1310 조나단이었다면 자동적으로 몸을 오른쪽으로 꺽고, 분명히 늘 다니던 길인 플랑슈
1311 가로 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묵게 될 호텔이 있는 성 플라시드 가를
1312 왼쪽에 두고, 라베 그레구아르 가까지 쭉 걷다가 계속해서 보지라르 가까지 간 다음
1313 뤽상브르 공원 쪽으로 갔다. 공원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조깅할 때 뛰는 길인 제일
1314 바깥쪽 원을, 울타리의 나무들을 따라 세 번 돌았다. 그리고는 방향을 남쪽으로
1315 바꾸고, 몽파르나스 가로 가서 몽파르나스 공동묘지를 찾았고, 거기에서 다시 묘지
1316 주의를 한 바퀴, 두 바퀴 돌았고, 다시 서쪽으로 가서 제15구를 향했다. 제15구를
1317 가로질러 세느 강까지 갔다가, 북동향의 제7구를 향해 올라갔고, 다시 제6구로
1318 갔으며여름철 낮은 긴 법이니까,또 계속해서 쉬지도 않고 걷다가
1319 뤽상브르 공원으로 다시 갔다. 공원에 다다랐을 때 공원문은 이미 조금 전부터 닫혀져
1320 있었다. 그는 참의원 건물 옆에 있는 공원 대형 철제문 앞에 잠시 섰다. 시간이 9시는
1321 되었을 것 같았는데도 밖은 아직 낮처럼 환했다. 엷게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불 빛과
1322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그림자의 테두리만이 밤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1323 보지라르 가에는 차량도 줄어들어 거의 뜸해졌다. 수많던 인파도 줄었다. 공원 출구나
1324 길 모퉁이에 군데군데 모여 있던 사람들도 이내 흩어져서 한 사람씩 오데옹 극장과 성
1325 쉴피스 성당 주변의 숱한 골목길로 사라져갔다. 한잔 하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1326 공기는 부드러웠고, 옅은 꽃내음이 묻어났다. 적막했다. 파리 전체가 저녁을 맞고
1327 있었다.
1328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여러 시간 동안 걸어다녀서 다리와 등과 어깨가 아파왔고,
1329 신발 속 발바닥은 불붙는 것 같았다. 허기도 갑자기 몰려와서 배가 뒤틀렸다. 스프와
1330 흰 식빵과 고기 한 점이 먹고 싶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까네뜨 가에
1331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봉사료를 포함해서 47 프랑 50 만 내면 되는
1332 정식을 비롯해서 갖가지 음식이 다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땀에 절어 악취를 풍기고,
1333 찢어진 바지를 입고 있는 처지로는 갈 수 없었다.
1334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추스렸다. 가는 도중 아싸 가에서 튀니지 사람이 하는
1335 잡화상을 보았다. 문이 아직 열려 있었다. 기름에 절인 정어리 통조림 하나, 염소
1336 젖으로 만든 치즈 한 덩이, 배 하나, 포도주 한 병과 아랍 식빵을 하나 샀다.
1337 호텔 방은 플랑슈 가에 있는 그의 방보다도 작았다. 한쪽 면이 출입문보다 약간 더
1338 길었다. 기껏해야 3 미터밖에 안 될 것 같았다. 벽들은 서로 직각을 이루며 맞물려
1339 있지도 않았고문쪽에서 보자면,폭이 2 미터쯤 되어 보이는 곳까지
1340 비스듬히 벌어지다가, 갑자기 좁아지면서 방의 전면에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며 서로
1341 붙어 있었다. 방의 모양새가 말하자면 관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관보다 훨씬
1342 더 넓지도 않았다. 긴 벽 쪽에 침대가 있었고, 그 맞은편에 세면대가 설치되어
1343 있었으며, 그 아래에는 안에서 밖으로 돌리며 끄집어낼 수 있게 만들어진 뒷물 대야가
1344 하나 있었고,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곳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세면대의 오른쪽
1345 위로는 천정 바로 밑으로 창문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것은 창문이라기보다는 두
1346 가닥의 끈으로 열고 닫을 수 있게 만든 유리가 끼워진 작은 채광구라고 하는 것이
1347 옳았다. 습하고 후끈한 미풍이 밖에서 나는 잡다한 소음을 그 구멍을 통해 관 속으로
1348 실어날랐다.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 화장실에서 물을 트는 소리, 스페인 어와 포르투칼
1349 어의 토막 단어들, 약간의 웃음소리, 어린애가 훌쩍거리는 소리 그리고 가끔은 아주
1350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
1351 조나단은 속옷 바람으로 침대가에 쪼그리고 앉아 저녁을 먹었다. 의자를 끌어다가
1352 그 위에 가방을 얹은 다음, 사온 물건 봉지를 펼쳐놓아 식탁 대용으로 썼다. 쬐끄만
1353 정어리를 주머니칼로 가로로 잘라 반쪽을 찍어 빵조각에 얹어서 한 입에 먹었다.
1354 물컹물컹하고 기름에 절은 생선 살이 싱거운 빵과 함께 뒤섞이며 기막히게 맛 좋은
1355 덩어리가 되었다. 레몬을 몇 방울 떨어뜨리면 맛이 더 훌륭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1356 하였지만.(한 입 먹고 나서 포도주를 병째로 들어 조금 마신 후 그것을 이 사이로
1357 지긋이 물면서 잠깐 물고 있으면 생선의 진한 뒷맛이 포도주의 약간 신 듯한 향료와
1358 어우러지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맛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은
1359 아니었다.) 조나단은 식사를 하고 있는 그 순간보다 더 맛있게 음식을 먹어 보았던
1360 적이 일생에 단 한 번도 없었을 것 같았다. 통조림 통에 정어리가 네 개 들어
1361 있었으므로 그런 맛을 여덟 번 맛볼 수 있었다. 빵과 함께 그것을 온 신경을 집중하여
1362 씹어먹었고, 포도주도 여덟 번 마셨다. 그는 아주 천천히 먹었다. 언젠가 신문에서
1363 배가 많이 고플 때 음식을 빨리 먹으면 몸에 좋지 않고 소화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는
1364 것을 읽은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천천히 먹는 또 다른 이유는
1365 그것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1366 정어리를 다 먹고, 깡통에 남아 있던 기름도 빵으로 훑어서 다 먹은 다음 치즈와
1367 배를 먹었다. 배는 어찌나 수분이 많던지 껍질을 깍다가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1368 그리고 치즈는 빈틈없이 단단히 뭉쳐져 있어서 칼날에 자꾸만 늘어붙었고, 맛이
1369 어찌나 시면서 쓰던지 잇몸이 순간적으로 아찔했으며, 잠깐 동안 침샘이 말라버려
1370 입이 건조해질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달콤하고 물이 많은 배를 한 조각 먹으면 다시
1371 괜찮아지면서 이와 입천정에서 떨어져 서로 엉키다가 혀를 타고 목 속으로 쏙
1372 들어가곤 하였다. 다시 치즈 한 입 먹고, 한 번 살짝 놀라고, 또 다시 그것을
1373 부드럽게 섞어주는 배를 한 조각 먹고, 치즈 먹고, 또 배 먹고. 맛이 너무나
1374 좋아서 그는 치즈를 쌌던 종이를 칼로 박박 긁었고, 조금 전에 칼로 썰어냈던 배의
1375 가운데 부분도 갉아먹었다.
1376 한동안 몽롱하게 앉아 혓바닥으로 이를 훑다가 마지막 남은 빵 조각과 포도주를
1377 삼켰다. 그런 다음 빈 깡통과 배 껍질과 치즈를 쌌던 종이를 빵 부스러기와 함께 돌돌
1378 말아서 봉지에 넣어 치웠고, 쓰레기 봉지와 빈 병을 문가에 세워둔 다음, 가방을
1379 의자에서 내려놓고, 의자를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은 후, 손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1380 그는 담요를 발치까지 밀어놓고, 홑이불만 덮었다. 그리고는 불을 껐다. 칠흑 같은
1381 어둠이었다. 위쪽 천장 근처의 구멍에서조차 한 줄기 가느다란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1382 다만 물기 찬 미풍과 멀리, 아주 멀리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만이 그 사이로 들어올
1383 뿐이었다. 몹시 후덥지근했다.
1384 "내일 자살해야지."
1385 그렇게 말하고 그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1386 그날 밤 악천후가 있었다. 곧 바로 이어가며 천둥 번개를 몰아치는 그런 것이
1387 아니라 뜸을 한참씩 들이면서 힘을 오랫동안 질질 끄는 악천후였다. 두 시간 동안
1388 하늘이 잔뜩 찌푸러지기만 하면서 살짝 번갯불을 비취다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조금
1389 내보기도 하다가, 어디에서 한바탕 터지는 것이 좋을지 모르는 양 도시의
1390 이곳저곳으로 몰려다니면서 세력을 점점 키우고, 더 넓게 퍼지더니 도시 전체를 얇은
1391 납 같은 덮개로 씌워놓았고, 다시 또 기다리다가 그런 망설임으로 인한 팽팽한
1392 긴장감이 감돌아도 여전히 폭발해 버리지 않았다. 덮개 아래로는 아무것도
1393 움직이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대기에 아주 미세한 바람도 일지 않았고, 이파리 하나,
1394 티끌 하나 꼼짝하지 않았고, 도시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굳어
1395 있는 속에서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도시 자체가 뇌우가 되어 하늘이
1396 터져버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마비된 긴장감 속에서 떨고 있는 듯 했다.
1397 그러다가 마침내, 이미 아침이 조금씩 밝아오려고 할 무렵 딱 한 번 요란하게
1398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얼마나 컸던지 도시 전체가 폭발해 버리는 것
1399 같았다. 조나단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깨어 있다가 그 소리를 들었던 것도
1400 아니고, 그것이 천둥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들었기 때문에 더 안 좋았다. 눈을 뜨는
1401 순간 '꽝!' 하는 소리는 끔찍스러운 공포로 그의 관절 마디마디에 부서졌고, 미처
1402 원인을 알지 못하던 그에게 그것은 죽음의 공포로 느껴지는 경악스러움이었다. 단지
1403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여러 갈래의 천둥소리로 다양한 반향을 내는 그
1404 소리의 여운 뿐이었다. 그는 밖에서 마치 책장처럼 집들이 차례로 넘어지고 있는 듯한
1405 소리를 들었고, 그때 그에게 떠오르던 첫 번째 생각은 '이제 이쯤에서 모든 것이
1406 끝나는구나'라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종말이 아니라, 지진이나
1407 핵 폭탄 혹은 그 둘 다 일어나거나 떨어져서, 어쨌든 완벽한 끝을 말하는 세상의 종말,
1408 혹은 세상의 멸망의 때가 왔다고 믿는 것이었다.
1409 그러나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두들겨대던 소리도, 넘어지는 소리도, 꺽어지는
1410 소리도, 메아리 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급작스럽게 나타나 지속되는
1411 침묵은 세상이 망하는 듯이 울려대던 굉음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그것은 조나단에게
1412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자신 이외의 것은 위든, 아래든, 반대편이든, 밖이든 방향을
1413 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이 몽땅 없어진 것으로 느껴졌다. 시각과 청각과 균형 감각 등의
1414 지각이 살아있다면 그가 어디에 있고, 또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런
1415 것들은 캄캄한 어둠과 침묵속으로 다 없어져버린 듯 했다. 그는 다만 마구 곤두박질
1416 치고 있는 심장과 온몸이 부들들 떨리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다. 자기가 침대에 있다는
1417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바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고 있지않다는 전제를
1418 한다면 누구의 침대고, 어디에 있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흔들거리는 것
1419 같아서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유일한 것을 놓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넘어지지
1420 않으려고 양손으로 매트리스를 꽉 움켜잡았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든지 잡을 수 있을
1421 만한 것을 찾았고, 고요 속에서 무슨 소리든지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1422 않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전무했다. 그때 뱃속이 꿈틀거리더니 역겨운 정어리
1423 냄새가 치밀어올랐다. 그는 절대로 토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1424 자기마저 속을 비워내 자신을 오물로 더럽히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
1425 같았다. 그러다가 소름이 끼치도록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오른쪽 위에서 아주
1426 희미한 빛이 가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쪽에 눈길을 붙들어 매었다. 사각형의
1427 작은 곳에 빛을 담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를 가름하는 구멍 같기도 하고, 방에 뚫린
1428 창문 같기도 한 것이 보였다. 도대체 누구의 방이란 말인가? 그곳은 분명 그의
1429 방이 아니었다! 평생 동안 그런 방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의 방에는 창문이
1430 침대 발치 쪽에 있고, 천장에 닿을 만큼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친척
1431 아저씨네 집에서 살았던 방도 아니고, 샤렝통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에 있던
1432 방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어렸을 때 쓰던 방이 아니라 지하실, 정말 부모님이 살던
1433 집의 지하실 같았다.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과 파리에서 늙어빠진 경비원이 된 것은
1434 다 꿈이고, 어린아이가 되어서 집의 지하실에 갇혀있는 것이 사실 같았다. 밖에는
1435 전쟁이 나서 집은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1436 왜 안 오는 걸까? 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지? 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야?
1437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살 수가
1438 없단 말이야!'
1439 그가 막 소리를 지르려던 참이었다. 남들로부터 버림을 당했다는 것이 애늙은이
1440 조나단 노엘에게 너무나 다급하고, 무섭고, 절망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1441 살 수 없다는 말을 침묵 속으로 크게 내뱉으려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가 막
1442 소리치려고 할 때 대답이 들렸다. 무슨 소리가 난 것이다.
1443 처음에는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조용하게. 그러다가 다시 두드리는
1444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위쪽 어디에선가 세 번째, 네 번째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1445 그러더니 그 소리는 규칙적으로 북을 두드리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가 되더니 점점
1446 더 요란해졌고, 마침내는 더 이상 북소리가 아니라 힘차게 좍좍 쏟아지는 소리가
1447 되었다. 조나단은 그 소리가 빗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1448 방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연한빛으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얼룩도
1449 채광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희미한 불빛 아래 호텔 방의 윤곽도 잡을 수 있게
1450 되었다. 세면대도, 의자도, 가방도, 벽도 다 보였다.
1451 매트리스를 꽉 움켜잡고 있던 손을 풀었고, 다리를 가슴에 닿게 오무린 다음 팔로
1452 둥글게 감싸안았다. 그렇게 잔뜩 웅크린 자세로 오랫동안, 아마 약 30분 정도는 족히
1453 될 시간을 가만히 있으면서 좍좍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1454 그리고는 일어서서 옷을 입었다. 희끄무레한 불빛으로도 방향을 잘 잡을 수 있었기
1455 때문에 불을 켤 필요도 없었다. 가방과 외투와 우산을 들고 방을 나서서 가만 가만히
1456 층계를 내려갔다. 프런트의 직원은 잠들어 있었다. 조나단은 까치발로 그의 옆을 지나,
1457 그를 깨우지 않으려는 생각에 출입문의 손잡이를 살그머니 돌렸다. '찰칵!'하는 작은
1458 소리가 났고, 문이 열렸다. 그는 자유 속으로 걸어나갔다.
1459 밖으로 나서니 서늘한 청회색의 아침 햇살이 그를 맞았다. 비는 이제 더 이상
1460 내리지 않았다. 빗물이 처마 끝과 차양에서만 방울방울 떨어졌고, 보도에는 군데군데
1461 물 웅덩이가 패여 있었다. 조나단은 세브르 가를 향해 내려갔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1462 한 사람도 없었고, 차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들은 차분하게, 거의 감동적일만큼 청순한
1463 모습으로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건물의 거만한 위용과 허풍스러움과
1464 위협적인 태도를 빗줄기로 씻어내린 것처럼 보였다. 길 건너편 봉 마르셰 백화점의
1465 식료품부 앞에 고양이가 한 마리 쇼윈도우를 따라가더니 말끔히 청소해 둔 야채
1466 판매대 밑으로 도망쳤다. 오른쪽 부시코 공원에는 나무들이 비에 젖어 바스락거렸다.
1467 한 쌍의 지빠귀새가 지저귀기 시작했고, 그 새소리가 길가의 건물에 부딪쳐 메아리를
1468 치면서 도시에 깔려 있던 고요가 더 깊어져갔다.
1469 조나단은 세브르 가를 가로질렀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 바크 가로 접어들었다.
1470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신발이 물에 젖은 아스팔트와 부딪치며 철벅철벅 소리를
1471 냈다. 꼭 맨발로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신발과 양말 속에서 미끄덩거리는 발의 촉감
1472 때문이 아니라 소리 때문에 그랬다. 신발과 양말을 훌렁 벗어버리고 맨발로 가고 싶은
1473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막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불썽사나울
1474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하기에는 게을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1475 빗물 웅덩이의 한가운데를 밟으며 이 웅덩이에서 저 웅덩이를 찾아 지그재그로 옮기며
1476 열심히 철벅거렸다. 그리고 한 번은 건너편에 있는 물이 많고 제법 넓은 웅덩이를
1477 보고 아^예 그쪽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는 젖은 신발을 반듯하게 해서 가차없이
1478 철벅거렸고, 물이 한쪽은 가게의 쇼윈도우 쪽으로 또 한쪽은 주차된 자동차 쪽으로
1479 튀어갔으며, 입고 있던 바지 가랭이 쪽으로도 튀었다. 정말 신나는 짓이었다. 그는
1480 어린아이들이 하는 그런 지저분한 유희를 다시 되찾은 대단한 자유라도 된다는 듯이
1481 즐겼다. 플랑슈 가에 도착하여 집의 대문을 들어서고, 잠겨져 있는 로카르 부인의
1482 숙소를 잽싸게 지나 뒷마당을 가로지르고, 좁다란 뒷계단을 올라갈 때도 그는 여전히
1483 활기찼고 행복해했다.
1484 그 위까지 다 와서 7층에 가까워져서야 층계 끄트머리의 일이 염려스러워졌다. 그
1485 위에 흉물스러운 비둘기가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똥과 바람에
1486 하늘거리는 작은 깃털에 둘러싸인 채, 빨갛고 갈퀴 발톱처럼 구부러진 발로 복도 끝에
1487 앉아 있을 비둘기가 그 공포스러운 멀건 눈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날개를
1488 펄럭거리고 먼지를 흩날리면서 그를 향해 날아오면 그 좁은 복도에서 그것을 피할
1489 도리가 도저히 없을 것 같았다.
1490 계단이 불과 다섯 개 남았지만 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쉬었다. 돌아서고 싶지는
1491 않았다. 그 마지막 몇 걸음을 떼어놓기 전에 아주 잠깐만 쉬면서 숨 좀 돌리고, 심장도
1492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싶었다.
1493 뒤를 돌아다 보았다. 시선이 나선형으로 꼬인 난간을 따라 깊숙히 밑으로 떨어졌다.
1494 각층마다 사선으로 비취는 햇살이 보였다. 아침 햇살은 그 사이 푸른색을 잃고
1495 노란색으로 변하여 더 따스해진 것 같았다. 아래층 세대들이 있는 곳에서 일찍 깬
1496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냉장고 문이 닫히는 둔한 소리,
1497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 음악소리. 그리고 그에게 아주 친숙한 냄새가 갑자기 코를
1498 찔러왔다. 라살르 부인의 커피 향기였다. 숨을 몇 번 깊게 들이마시자 마치 직접
1499 커피를 마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가방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갑자기 공포가
1500 사라져버렸다.
1501 복도에 다다랐을 때 두 가지가 눈에 얼른 띄었다. 닫혀져 있는 창문과 공동 변소
1502 옆의 대야 위에 말리려고 펼쳐놓은 걸레였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1503 강해서 시야가 가로막혔기 때문에 그는 미처 복도 끝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어느
1504 정도 진정된 마음으로 빛이 들어오는 곳을 지나갔고, 그 뒤의 그늘진 곳으로 계속해서
1505 걸어들어갔다. 복도는 완전히 비어 있었다. 비둘기는 온데간데 흔적이 없었다. 바닥의
1506 오물도 다 치워져 있었다. 깃털도 없었다. 붉은색 타일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던 작은
1507 깃털도 보이지 않았다.
1508 (추천의 글)
1509 * 탁월한 심리 분석을 밀도 있는 필치를 통해 소설로 완성시킨 이 시대의 독보적인
1510 문학 작품
1511 "라인 메르쿠어"
1512 * 인간에 대한 아주 세밀한 필치로 이미 고전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쥐스킨트의
1513 밀도 높은 작품
1514 "아벤트짜이퉁"
1515 * 쥐스킨트가 묘사하는 것은 단순히 느끼거나 보거나 들을 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1516 허무하고 빈한한 인생에서 느끼는 복잡한 내면의 세계를 탁월한 묘사기법을 통해
1517 그려내고 있다.
1518 "타게스 안짜이거"
1519 (책을 옮기고 나서)
1520 소유란 무엇인가?
1521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은
1522 왜 그토록 소유를 위해 온갖 정성을 바치는가? 때로 용의 주도하고, 때로 견고해
1523 보이기까지 하는 우리의 계획들은 한낱 사소한 것으로 인해 무참히 붕괴되어버릴 수
1524 있는 위험을 얼마나 많이 안고 있는가? 소유하기 위해서, 또 소유한 것을 지키기
1525 위해서 한 발 한 발 끊임없이 내딛는 (삶)이라는 이름의 우리네 고투는 얼마나 단단한
1526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는가? 벽돌을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쌓아올리둣 조심하며 삶을
1527 가꾸어나가는 자의 불안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1528 '비둘기'의 주인공 조나단 노엘은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1529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든 전형적인 모델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어디에선가 본
1530 듯한 느낌을 주고, 가까이에 그런 비슷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심증을 갖게 하고,
1531 때로는 책을 읽는 사람 자신이 언젠가 느껴봤음직한 생각들을 작가는 그를 통해
1532 표현했다. 그것도 특수 미세 현미경을 통하여 치밀하게 관찰한 것처럼 복잡하게 얽혀
1533 있는 마음의 갈래를 한 올 한 올씩 정교하게 풀어냈다.
1534 그리고 난,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가로서 그의 뇌 속으로 들어가 그가 갖고
1535 있는 생각의 흐름을 쫓았다. 그의 작품 '좀머 씨 이야기'와 '콘트라베이스'를 번역하며
1536 이미 들어가 보았던 그의 마음의 행로에서 난 다시 한 번 색다른 많은 것을 보았다.
1537 그것들을 원래의 상태대로 그대로 원고지에 토해 놓는 것이 말하자면 내
1538 작업이었다. 굳은 것은 굳은 대로, 사그러지기 쉬운 것은 사그러지기 쉬은 대로, 익은
1539 것은 익은 대로, 덜 익은 것은 또 덜익은 대로. 정직한 심부름꾼이 되어 덜함도 더함도
1540 없이 작가의 마음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그대로 옮겨다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541 쟁취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는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1542 이루어내려고 노력하는 마음 그 자체가 노력을 기울인 사람에게 온전히 돌아가는
1543 몫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유리 상자 안에 갖혀 있는 사람을 그린 것 같은 인위적인
1544 구도가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선을 분명히 그어놓음으로써 보다
1545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작가의 뜻이 아니었을까 헤아려본다. 어쨌든 책의
1546 내용이나 느낌에 대해서는 내가 해놓은 작업을 통해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만나게 된
1547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서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단지 조금 먼저 읽은
1548 사람으로서 책 읽는 재미를 조금이라도 앗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549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남의 마음 속에 깊숙히 들어갔다 나와야 되는 작업이라서
1550 창작보다 오히려 더 힘든 산고를 겪고 다시 또 한권의 책을 내놓게 되어 기쁘다.
1551 이 기쁨을 사랑하는 남편, 아들 성표 그리고 딸 성우와 함께 나누어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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